인간의 숲에서 살아남기(5)

[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가족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요.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가족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 하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인연을 이어나가요. 가족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고 나와 가장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들을 가깝게 느끼고, 서로를 도와주고, 또한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을 합쳐서 이겨내기도 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 찾아오는 상당수의 환자분들 역시 사연자분처럼 가족 간의 문제로 찾아오시는 분들이에요. 너무나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보통의 관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상처를 주는거죠.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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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가족 간의 사랑을 지나치게 절대화하는 데에서 시작해요. 이것을 ‘가족신화(Family myth)’라고 해요. 가족 전체가 공유하는 허구의 믿음을 의미해요. 우리는 말을 배우고, 사회에 나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셨는지, 형제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지에 대하여 배워요. 그리고 이것을 인간이 가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슬프게도, 이상은 그저 이상일뿐이에요. 이상은 현실이 아니에요. 인간은 각자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이 모인 가족이 완전할 수가 없어요. 부모가 자식에게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기도 하지요. 반대로 자식이 나이 드신 부모를 버리기도 해요. 형제간에 부모님의 유산을 가지고 싸우기도 해요. 설령 그 정도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100개의 가족이 있다면 100개의 가족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고, 100개 이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요. 우리가 초등학생 시절 도덕책에서 배운 이상적인 가족은 단언컨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이상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격차가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들어요. 사람이 모이면 누군가는 반드시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이 있고, 상황을 주도하기보다는 상황에 맞춰 따라가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에요. 가족 내에서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우면 주도하는 사람, 대개 부모나 오빠나 형처럼 가족 서열상 상대적으로 위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모든 문제를 자신에 맞춰서 결정하게 되고, 따라가는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부당한 결정을 참아내게 되죠.

 

이렇게 가족이 서로를 강하게 만들고 구성원 전체의 욕구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일부의 욕구만을 대표하고 희생당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희생당하게 만드는 가족들을 가족 본래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가족. 역기능적 가족이라고 불러요.

역기능적 가족에는 여러 가지의 형태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나치게 밀착된 형태의 역기능적 가족’의 형태가 많아요. 한마디로 가족에 대하여 절대충성하고 가족 간의 역할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고 가족에 속해도 개개인의 삶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형태의 역기능적 가족의 형태예요. 한 마디로 가족 구성원 간에 거리 개념이 없는 가족을 의미해요.

지나치게 밀착된 형태의 역기능적 가족이란, 한마디로 가족 전체를 한 몸처럼 생각하는 거죠. 삶의 방식을 가족에 맞추고, 가족 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가족 내에서의 권력관계에 맞춰 해결하고 아무 문제의식도 가져버리지 않는거죠. 아버지와 딸의 의견이 다를 때에는 무조건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는 그런 방식이지요.

그런데 사람이 여럿 모이다 보면 모두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거든요? 이런 지나치게 밀착된 역기능적 가족에서는 그러면 가족 내에서 서열이 높은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돼요. 그리고 결정하는 사람이나 따라가는 사람이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돼요.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가족은 서로 다른 개체예요. 한 때는 같은 몸이었지만 이제는 떨어져 나온거죠. 그러면 이제 사연자분처럼 낮은 서열의 가족은 희생을 하면서도 뭔가 불편한데 이 불편한 감정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거든요?

그러면 가족에 대한 병적인 죄책감이 생기게 돼요. ‘가족의 규칙은 절대적이고 부모는 무조건 옳은데, 내 감정은 불편하네? 이건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야.’이런 식으로요. 가족 역동 내에서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Scapegoat, 즉 희생자라고 불러요. 모든 부분에서 양보를 하면서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받고, 스스로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지요.

이렇게 겉으로 꺼내놓을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지속되면 병적인 죄책감을 가지게 돼요. 죄책감은 본질적으로는 자신이 자신을 공격하는 마음이거든요. 보이지 않는 자해와 같은 것이지요.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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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기능적 가족 때문에 고통받는 당신에게.

너무도 당연하지만,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대전제를 알려드릴게요.

1. “우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켜주고, 아껴줘야 하지만 그만큼 한 명의 개인으로서의 자신도 사랑해줘야 합니다.”

2.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의견 차이가 나고, 그럼으로써 서로에게 실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아무런 잘못된 일도 아니에요.”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그 안에 너무 오래 빠져있어서는 안 되는 감정입니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불안과 마찬가지로 경고를 의미해요. 지금 내가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사회적 압력으로 인하여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때 나오는 불편함을 의미해요.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어요. 가족 간의 문제로 당신이 죄책감을 느끼고 계시다면 그것은 사연자분이 현재 상황에 대하여 무언가를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이지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무언가 잘못되거나 불효자이거나 인성이 못된 사람이란 근거가 아니에요.

신화가 인간에게 주는 느낌 중 가장 중요한건 공포예요.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번개를 제우스 신의 분노라고 생각했었죠. 물론 이러한 신화가 한 편으로는 인간을 지켜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기도 해요. 번개를 피하는 것은 안전을 위해서 옳은 판단이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번개가 나에게 내려칠까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 신화에 도전해야 해요. 가족 간의 역동과 규칙에 도전하는 것은 불편하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가족 간의 암묵적인 규칙은 거스르면 번개를 맞아서 지옥에 떨어지는 무슨 신이 만든 규칙은 아니거든요,

가족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옛날부터 교육받고, 책에서 읽고, 전래동화에서 읽은 것들이 반드시 여러분의 지금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족에게 느끼는 부당함과 분노를 너무 가족에 반하는 불효나 반역처럼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가족 내의 규칙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니까요. 부모도, 오빠도, 심지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저도 종종, 아니 때때로 자주 틀립니다. 늘 옳기만 한 사람은 없어요.

 

만일 당신이 역기능적 가족의 희생자라면, 아마 당신은 단 한번도 가족에 대한 당신의 감정적인 불편함을 인정받지 못했을 겁니다. 역기능적 가족의 고통을 벗어나는 그 첫걸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해주세요. 당신은 가족이라는 회의에서 여러 가지 의견을 내는 한 명의 대의원이지 거대한 기계에서 한 가지 역할만을 해야 하는 톱니바퀴가 아니에요. 당신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결코 당신의 인성이 잘못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겨우 그것 좀 한 것 가지고 뭘 그리 유세냐’

라고 말을 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을 한 사람이 잘못된 거예요. 설령 다른 가족들이 당신의 감정을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당신만은 사연자분의 감정을 인정해주셔야 해요. 가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참아냈던 거예요. 만일 가족들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희생했는데도 마음이 불편했다면 이제는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고, 그것에 대하여 의견을 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에요.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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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랑은 사랑받을만해서 하는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거예요. 사랑의 진가는요,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의 사람이 아닐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에 있어요. 사랑할만한 사람을 골라서 그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예요.

가족 간에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없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1과 0이 되어버려요. 가족 간에 거리가 있다는 것은 가족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상대방에게 거리를 둠으로써 상대방이 나에게 완벽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참아내고, 그럼으로써 곁에 있을 수 있어요.

만일, 가족의 어떠한 면이 정말로 존중받아야 할 사연자분의 어떠한 면을 침해시킨다면 그때는 거리를 두는 거예요. 물론 거리를 벌리면 분명히 상대방은 실망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상대방의 요구를 모두 다 들어주지 않으면 관계가 끊어지는 그런 관계를 우리는 가족 간의 사랑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 실망과 거리는 잘못된 방식의 관계를 개선시켜줄겁니다.

제가 이 문제로 찾아오는 환자분들마다 드리는 말씀이 있어요.

“당신은 가족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도 당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뜻이 맞아 서로 자연스레 사랑한다면 참 다행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탓하지 마세요.”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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