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삼성 마음숲 정신과, 김재옥 전문의]
사연)
1달 전쯤 병원에 가서 약을 먹고 있습니다. 메디키넷과 헬스피온입니다. 지난주에 약의 용량을 올렸는데 그 약의 부작용이 식욕저하라던데 저는 오히려 저녁에 식욕이 증가한 것인지 아니면 식욕저하에 제가 신경을 써서 그런지 폭식을 하다가 생활패턴이 흐트러졌고 그래서 또 처음에 제가 병원에 갔을 때처럼 잠만 자고 지냈습니다. 약도 먹는 둥 마는 둥 이 게으름과 잠밖에 안 자는 생활이 싫어서 병원까지 간 것인데요. 다니던 병원에 가서 말하면 되겠지만 일단 이번 주에 예약에 안 갔고 병원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이 또 아무것도 없이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운동도 안 갔고 다니던 학원도 안 나갔고 지금 취업 준비 중인데, 당장 월요일에 면접 일정이 잡혔는데 준비도 아직 안 했습니다. 해야지 생각만 하면서요(하려는 의지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걸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게을러서인지 정말 저도 저를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게으름이 제 삶을 정말 갉아먹는 걸 아는데도 방치하면서 제 인생을 망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병적으로 게으르고 포기만 하는지 제가 한심스러운데 못 고치는 게 짜증이 납니다. 지금 다니는 병원에 가서 처음 약을 먹었을 때는 병원에 가서 약이라도 먹어서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 의지 때문인지 아니면 약 효과인지 그럭저럭 운동도 하고 청소도 하고 잠도 적당히 잤는데 지난주 내내 다시 돌아와서 또 아무 때나 자고 하는 일 없이 정말 먹고 자고만 해서 정말 실망스럽고 좌절감이 듭니다. 일단 약이 다 떨어져서 지금 병원 예약을 다시 잡을 때까지는 그러니까 면접 준비 때까지는 어떻게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절망스럽습니다.
게다가 진료 때 제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간략하게만 말씀드렸는데 더 물어보시면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려야 할지도 사실 겁이 납니다. 제 삶이 너무 실패투성이에 한심한 선택만 했고 범법까지 있고 병이라고 핑계 대는 척하면서 제 똑바로 살지 않은 삶을 변명하게 될 것 같아서 게다가 솔직히 말씀드릴 수 있을지 자꾸 물어보시면 거짓말을 하게 될 것 같아서 혼란스럽습니다. 생활은 뭐로 하냐고 물어보시는데 유흥업소 일을 작년까지 하면서 살았는데 그렇게 말하기가 좀 그래서 그냥 놀았다고 했어요.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그만두었고 이제 정말 제대로 직장 잡고 살아야 하는데 그걸 아는데 왜 저는 아무 행동도 안 하고 어렵게 잡은 기회도 포기하려고 할까요? 지금 제 상태로는 면접을 열심히 준비해도 떨어질 확률이 큰데요. 제 삶에 실망이 너무 커서일까요? 남은 삶이 훨씬 긴 것을 아는데, 후회가 아무 쓸모가 없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남은 제 삶이 아무리 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고 그냥 제가 다 망쳐버린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조차 과거에 스스로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너무 과대평가해서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쩌다 이렇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쓰일 곳이 없게 된 건지 정말 제가 싫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잠만 자면서 살면 제 미래는 뻔합니다. 확 마음먹었을 때 죽거나 아니면 박카스 할머니처럼 살거나 주변에 짐이 되겠죠. 그렇게 사느니 지금 죽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도 저는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만 할까요...? 3달 내내 집에 틀어박혀서 잠만 자고 먹느라 살만 15kg이 쪘어요. 한숨만 나옵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삼성 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재옥입니다.
메디키넷과 헬스피온(부프로피온)은 의욕과 에너지를 증가시키는 대표적인 약물입니다. 하지만 의욕과 에너지가 증가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자연히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자분이 설정하신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에 의욕과 에너지가 생겨도 그 효과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약을 드신 초반에는 일반적인 삶으로 돌아왔다가도, 다시 원래의 게으른 생활로 돌아오게 된 듯합니다.
유흥업소 일 같이 공개하기 어려운 일을 하시는 분들의 경우, 일반적인 삶으로 돌아올 때 지금 같은 상황을 겪곤 합니다.
그 이유는 동기부여가 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개하기 어려운 일의 특성 때문에, 주변에 친한 일반인 친구들은 모두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같은 업계 지인들만 곁에 남게 됩니다. 모든 직장이 그렇듯이, 직장에서 만난 관계는 깊어지기 어렵습니다. 추억을 가지고 있는, 깊은 관계의 친구들은 이미 사라졌고, 업계를 떠나면 남아있는 업계 지인마저 관계가 끊어지는 상황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업계를 떠나 일상생활을 하려 해도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업소 일을 한 기간이 길수록 세상의 변화를 알지 못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생활을 어렵게 하고, 구직에도 제한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는 것보다는, 기술을 배워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직업적인 능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 나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는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는 덜 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 적응에 더 쉬운 편입니다.
경제적인 독립이 가능하며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반적인 직장을 찾아 삶을 안정화하고, 그 이후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아가 안정된 삶을 정착시켜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직업 훈련에 몇 개월, 이후 취직을 하고 삶이 안정화되는데 몇 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가정하면,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삶을 안정화하는데 필요할 듯합니다. 안정화되는데 걸리는 시간을 가정하는 이유는, 기약 없는 고통은 2주일도 참기 어렵지만, 기약이 있는 고통은 2년도 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과 직장에 대한 상담을 정확히 받기 위해서는, 유흥업소 일에 대한 것들을 솔직하게 주치의 선생님에게 털어놓으셔야 합니다. 어떤 부분의 도움이 필요한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움을 드리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내 과거를 알고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질문자분을 더 편안하게 만드는 면도 있습니다.
사진_freepik
우리는 늘 삶의 일부분에 대해서만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순간은 그 결정이 너무 작고 미약해 보이지만, 시간이 흘러 그 결정이 쌓이며 큰 흐름을 만들고, 결국은 그 흐름 속에서 다시 작은 결정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은 너무 다른 흐름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느껴지실 테지만, 그 흐름 역시 인생의 끝에서 보면 변화의 가능성이 충분한 시점으로 여겨지실 겁니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아갈 때 눈이 부신 것은 순간입니다. 잠시 눈을 찡그리시더라도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재옥쌤 짱!"
"정말 도움됩니다. 조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