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을 위한 심리학6

 [정신의학신문 :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 아빠는 저를 너무 예뻐하고 챙겨주는 딸바보이지만,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으세요. 물 한잔도 스스로 떠오지 않고 엄마를 시키고, 엄마를 늘 무시해요. 모르면 가만히나 있으라고 할 때가 많고요. 그런 모습에 화가 나서 아빠에게 대들면 오히려 엄마가 저보고 아빠에게 버릇없게 굴지 말래요. 아빠가 너한테 뭘 잘못했길래 늘 불만이 그렇게 많냐고 해요. 아빠에게 화가 나는 제 마음이 불편해요.” 

 

성차별주의에는 적대적(hostile) 시각뿐만 아니라 온정적(benevolent) 시각도 함께 존재합니다. 온정적 시각에서는 여성이 일정한 역할 안에 머물러만 있다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평화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온정적 시각을 느끼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적대적 시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진심 어린 태도와 애정을 보여주는 사람을 향해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 개인은 혼란에 빠집니다.

양육자의 생각에 충분히 동의하지 않는 것이, 양육자의 사랑까지 전부다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러나 어떤 양육자는 그 둘을 마치 같은 뜻이라고 단정 짓기도 합니다. 자녀 역시 자신의 진짜 마음과 양육자의 주장을 혼동하며, ‘내가 진짜 배은망덕한 사람인가?’라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기적이거나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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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조종하는 죄책감

하지만 누군가가 베푼 친절에 대해 당신이 꼭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또한 문제의식을 가지는 게 그동안 자신들이 쏟은 애정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규정하는 양육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의미 부여를 했다고 해서 정말로 그런 의미인 것은 아니니까요. 헷갈리지 않아야 합니다. 양육자에게 받았던 애정은 그것대로 고마운 것이지만, 자신이 목격한 부당한 것들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애정이 담긴 행위 자체에도 문제 요소는 당연히 있을 수 있고요. 

다른 사람의 사랑과 인간적인 모습은 왜곡하지 않고 마음 안에 간직하면 됩니다. 사랑한다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용서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그 사람에게 인간적 면모가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부정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빠는 사실 따뜻한 사람인데 내가 너무 나쁘게만 보는 건가?’라는 생각도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아빠가 해준 건 하나도 없어!’라면서 누군가의 수고를 통째로 부정하는 시도 역시 결국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누군가를 부당하게 평가한 것만 같은 죄책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는 건 실제 죄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죄책감은 명시적인 명령이나 억압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면서 은밀하게 사람을 조종하기 때문에, 이 감정을 잘 살펴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죄책감을 유발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죄책감은 우리가 일정 수준의 도덕성을 유지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합당한 죄책감인 경우이지요. 실제로는 가지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이 우리를 움직이게 그냥 둔다면 삶은 계속해서 제한당할 것입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희생과 불필요한 자기 처벌(self-punishment), 그리고 그 자기 처벌적 상태에 대한 새로운 분노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오랫동안 양육자의 영향을 받습니다. 양육자에게도 실망스러운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일은 아이에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양육자에게 안전하게 보호받지 못하다는 느낌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양육자가 잘못됐고, 싫고, 너무한다고 외치는 경우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나쁜 아이일지 모른다는 무의식적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로널드 페어베언(Ronald Fairbairn)은 고통을 주는 부모의 측면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려운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죄인인 편이 낫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겨온, 자연스러워 보이는 전제에 대한 의구심과 부당하다는 느낌 뒤에는 무언가를 거스른다는 두려움이 따라옵니다. 이는 이성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는 것과는 별개의 감정인데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생각이, 어쩌면 큰 흐름을 거역하는 위험한 것일지 모른다는 감정이 따라옵니다. 그러니 마음이 결코 편할 수 없지요. 그러나 마음 안에 이런 경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그 마음에 지배당할 확률을 줄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마치 위험한 사람처럼 느끼는 그 마음을 잘 소화시켜야 합니다.

자신이 취약한 부분도 있지만 힘도 가졌으며, 때때로 분노도 느끼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파괴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세요. 자신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귀찮게 하고, 분노하게 만들 수는 있으나 진정으로 불행하게 하거나 나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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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가족 안에서 살아가기

가혹함의 정도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대단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가정환경에 놓인 사람도 많습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 있다면 일단은 자신의 안전과 생존을 도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어려운 목표를 달성한 셈입니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과정이 모욕적이거나 비굴하게 보이더라도요. 일단 몸과 마음이 최대한 많이 다치지 않고 잘 살아남아야 그 이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이 가족에게 받는 대우와 자신의 가치를 혼동할 확률이 높습니다. 에너지가 많이 들겠지만 가족에게 받는 대우와 자신의 가치를 분리하기 위해 계속해서 애쓰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우선 안전을 확보한 뒤 심리적, 경제적, 관계적 자원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봅니다.

 

만약 자신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라도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일단 자신이 가진 힘의 한계를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가족 구성원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체념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설득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설득을 하고 싶다면 에너지와 시간의 한계선을 정해놓고 딱 그만큼만 쓰도록 하세요. 자신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했으면 합니다. 상대의 변화 ‘여부’는 여러분이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반응할지 결정하는 것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자신에 대해 너무 애써서 해명하려고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 나를 오해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평가절하하는 일은 물론 익숙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오해 없이 받아들여지려는 노력을 내려놓을수록, 자신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에 수록된 에피소드 「친구 같은 아빠에게 자꾸 불만이 생겨요」에서 발췌·편집했습니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부속 의료원에서 수련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에서 석사를 수료했다. 12년간 1천여 명이 넘는 내담자를 만났으며, 여성들이 지닌 다양한 상처에 사회 환경 및 젠더 이슈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깨닫고 이 문제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여성학을 공부했다. 

현재 광화문에서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위주로 진료하면서, 개인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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