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을 위한 심리학5
[정신의학신문 :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남자들만 잔뜩 나와서 ‘형님’ 하며 서열을 확인하고, 거기에 여자 한두 명이 나오면 당연하다는 듯 외모 평가를 해요. 아빠의 육아는 예능이 되는데 엄마의 육아는 예능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여자 아이돌과 담배를 연결시켜서 놀리는 행위는 ‘드립’이 되는데 남자 아이돌에게는 ‘드립’이 될 수 없다는 것도 화가 나고 답답해요. 어린 딸에게 분홍 드레스만 입히고 여아용 장난감만 사주는 친구에게는 성별 고정관념에 대해 말해주고픈 마음이 들다가도 관두게 돼요. ‘내가 친구를 가르치려는 건가? 나는 얼마나 분별력 있고 잘났다고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내가 예민한 걸까?’ 이런 생각들을 해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해도 괜찮아
영화 〈매트릭스〉에는 파란 약과 빨간 약을 선택하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이대로 끝난 채 네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돼. 하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남아 끝까지 가게 되지.’라는 대사가 등장하죠. 진실을 알고자 빨간 약을 선택하는 영화 속 주인공에 빗대어, 우리는 일상에 공기처럼 배어 있는 성차별과 성별 고정관념을 감지하게 된 상태를 빨간 약을 먹었다고 표현합니다. 자연스럽게 숨 쉬며 살아왔던 공기 안에 미세먼지가 있고 그 미세먼지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안 순간, 이전처럼 공기를 편하게 들이킬 수 없겠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동시에 엄청난 해방감도 느낍니다. 답답한 줄도 몰랐던 것, 또는 뭔가 답답하긴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어 문제라고 얘기할 수도 없었던 무언가에 이름이 생기면, 막힌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낄 수 있거든요.
빨간 약을 먹으면 처음에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낯설어집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더 이상 당연히 여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들, 때로는 위협이라고 느껴지는 것들도 많아집니다. 분명 세상은 그대로인데, 그곳을 바라보는 내 관점이 달라져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유쾌한 지인이었던 친구도, 주말이면 아무 생각 없이 보던 예능 프로그램도 이제는 불편하기만 합니다. 진실을 알아가는 일이 반가우면서도 일상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내적 갈등이 본격화됩니다. 자신이 잘못되거나 이상해진 것이 아닙니다. 혼란스러운 게 아주 당연하죠.
빨간 약을 먹으면 왜 화가 나는 걸까
빨간 약을 먹으면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초반에 사로잡히게 되는 감정은 주로 분노입니다. 삶에서 부당한 요소가 속속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 화가 나는 것이죠. ‘내가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이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 성차별이 만연한 회사를 견디지 못하고 퇴사를 불사하거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생각하며 체념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타인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묻고 싶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지죠.
일상에서 느끼는 차별과 억압이 훈훈한 분위기, 즐거운 동요, 예쁜 옷이라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분노는 더욱 갈 곳을 잃고 맙니다. 자신의 분노가 마치 웃는 낯에 침 뱉는 것처럼 느껴져 분노의 감정 자체가 불편해지고,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죠.
분노라는 감정은 그 자체로도 강렬하고 즉각적이어서 다루기 어렵지만,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결합될 때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다. 사회에서는 분노나 공격성을 여성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고,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난감한 건, 여성들이 이러한 인식을 은연중에 내면화하여 자신의 분노가 왠지 모르게 부적합하고 위험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점입니다. 자기 자신과 불화하는 상황, 즉 자신의 감정을 두려워하는 상황은 자기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과 자신감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분노-무력감-자기 비난의 순환 고리
이처럼 분노 다음에는 무력감이 찾아옵니다. 불편하다고 느끼는 많은 일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체계가 잡혀 있고, 견고하죠. 변화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답답해집니다. 분노하면서 에너지가 순간적으로 치솟았다가, 무력감이 들면서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분노와 무력감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자기 비난이라는 종착지에 도착합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나는 왜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사건건 화를 내는 걸까?’, ‘내게 누군가를 지적할 자격이 있기는 한 걸까?’. 이렇게 자신을 추궁하고 질책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자기 성찰과 자기 비난은 전혀 다릅니다. 자기 성찰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돌아보는 작업이지, 스스로를 야단치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찰 또는 반성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자주 비난합니다. 게다가 자기를 가혹하게 바라볼수록 자신의 실체에 더 가깝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이렇게 ‘분노-무력감-자기 비난’의 순환 고리는 지속되고 결국 지쳐버리고 맙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
‘분노-무력감-자기 비난’의 사이클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은,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탓하지 말고 이 사이클 안에 존재하는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표현은 쉽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쉬웠다면 애초에 자기 비난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겠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그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수치심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소한 것에 화가 난다면, 그 일이 겉으로는 사소해 보일 수 있으나 여러분에겐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는 왜 이렇게 사소한 일에 화가 나는 걸까?”가 아니라, “겉으로 사소해 보이는 이 일에 어떤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로 바꿔서 질문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지금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의 사이클이 정말로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혼란임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모든 변화에는 반드시 스트레스가 발생합니다. 취업이나 승진, 연애처럼 자신이 명백히 원했던 즐거운 변화에도 상당한 스트레스가 따라옵니다. 이렇게 이 감정의 사이클을, 자신에게 아주 의미있고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시그널로 여기면서, 빨리 서둘러서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잘 데리고 가면서, 찬찬히 들여다보고, 다독여 나갔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지킨다는 것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자신을 더 잘 지킬 수 있습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과 ‘잘 지키는’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드릴게요. 우리 모두에게는 고통받고 싶지 않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지키려는 시도가 때때로 자신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리적인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방식을 심리학에서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하는데요. 불안이나 슬픔, 분노, 억울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무의식 안으로 억압(repression)하거나 마치 그런 감정은 자신에게 없는 것처럼 고립(isolation)시키는 것 역시 방어기제의 하나입니다. 또는 자신이 부당하다고 느낄 만한 상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denial)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일시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는 있지만, 억압된 것들은 결국 우리의 행복을 방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노를 느낄 때, 반사적으로 상대를 조롱하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리는 것 역시 행동화(acting out)라는 방어기제인데요. 분노가 올라올 만큼 자신을 위협한 무언가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반응인 것이죠.
방어기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도라는 의미이지, 모든 방어기제가 스스로를 ‘제대로’ 지켜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노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순간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소중하게 여겼던 관계에 금이 가거나 수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성숙하고 파괴적인 방어기제도 있고 성숙하고 건설적인 방어기제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상당히 습관적이며 자동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자유롭게 조절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서둘러 처리하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고 일단 지켜보세요. 파괴적인 방어기제를 반사적으로 작동시킬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전략적이고 효과적으로 상황에 대응하고 자신을 잘 보호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에 수록된 에피소드 「일상이 불편해졌어요」에서 발췌·편집했습니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부속 의료원에서 수련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에서 석사를 수료했다. 12년간 1천여 명이 넘는 내담자를 만났으며, 여성들이 지닌 다양한 상처에 사회 환경 및 젠더 이슈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깨닫고 이 문제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여성학을 공부했다.
현재 광화문에서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위주로 진료하면서, 개인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