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직장과 심리적 거리두기를 해보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됩니다. 당장 생계가 걸려 있기도 하고 흥청망청 살 나이도 아닌지라 '노후 준비, 이대로 괜찮은가'와 같은 주제의 다큐를 보면서 이제는 제 선호나 꿈보다 현실적으로 돈을 모아야 하진 않을까, 자기 계발을 해도 돈 되는 걸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합니다. 최근 들어 드는 생각이 있는데 '지금은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지만, 이제 더 나이가 들어 돈이 없으면, 사람 구실 못하면, 자살이 타의적 의무가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1년 전에 지쳐서 퇴사를 하고 그 후 취업을 시도해봤지만 길어야 3주 다니다 몇 달씩 침대에만 누워있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감정 소모도 너무 심했고 처리가 잘 안 되니까 결국 출근하려는데 방문도 못 열겠고 집에서 몸이 멈춰 회사에 못 가는 현상들이 반복됐습니다. 그렇게 퇴사들이 반복되었고요..
현재 개인플레이가 강한 일을 다시 시작하기는 했는데, 단기 계약직이기도 해서 부담도 덜하고 전에 비하면 사회에 나갈 발판으로써도 좋기는 한데요. 한 가지 문제는 그럼에도 여전히 직장에서 받은 감정처리를 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겁니다. 퇴근하고 잠들기 직전까지, 가끔은 주말까지요. 누우면 자꾸 생각이 나고 힘이 듭니다. 감정도 써보고 말해보고 이리저리 스스로 다독이기도 하고 필요하면 욕도 해보는데.. 아무리 해도 감정처리 시간이 너무 많이 드니까 이게 맞는 건가, 도 싶고, 난 여전히 직장과 거리를 못 두는 사람인가 싶고,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고.. 머리가 복잡해요.. 원래는 개인 시간에 이직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나도 안 됩니다.. ㅠ 저 맞게 가고 있는 건가요? 지나치게 의존적인 성격이라 상담이나 병원도 무섭고 진퇴양난이에요..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의학신문입니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의 감정 소모로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군요.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현실적인 여건과 감정처리로 힘들어하는 마음의 괴로움 사이에서 고민이 정말 많을 수밖에 없으실 듯합니다. 이미 여러 차례 직장을 옮기셨고, 지금은 개인적인 업무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 직장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힘들어하고 계신다니 질문자님 말씀처럼 정말 지치지 않을 수 없어 보입니다.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쓰며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괴로움은 사라지질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 문제의 결과를 처리하거나, 2) 문제의 원인을 조정해보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전자가 괴로운 감정을 처리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직장을 바꾸어보거나 하는 것이 될 테지요. 안타까운 점은 두 가지 모두 질문자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시도해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문제가 도통 해결되지 않고 되돌이표처럼 반복되고만 있어 보입니다. 그 점이 질문자님을 더욱 막막하게 만드는 것 같고요.
왜 이렇게 해결이 안 되고 반복되기만 하는 것일까요? 우선 첫 번째로는 지금 시도하고 계신 방법에 다소간의 디테일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신 것처럼 감정을 적어보는 것, 이야기하는 것, 스스로를 다독여주는 것, 때로는 누군가를 욕해보는 것 같은 방법들은 마음속의 갈등을 해소하는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잘’ 하는가는 그때그때 사람마다 상황마다 아주 미묘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조금은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만 마음을 들여다보고 처리하는 작업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자신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들여다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좀 더 전문적인 시각에서 찬찬히 뜯어봐 줄 누군가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환자분들에게 해드리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도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아쉽게도 질문자님께서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직장 사람들과 갈등이 반복되는 것인지, 질문자님께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스트레스를 들여가며 해결해야 하는 감정이 어떤 것들인지를 자세하기 듣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들여다보고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맞춤형 조언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많은 분들이 놓치고 계시는 부분을 고려하여 질문자님께 팁을 드리자면 ‘반복되는 문제의 패턴을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라는 걸 유념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심란하게 만드는 각각의 사건들과 사람들은 모두 그때그때 다릅니다. 각각의 배경과 스토리가 있겠지요. 하지만 서로 다른 사건들이 반복해서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 사건들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사건들을 구조화해서 그 사건이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게 이르는 과정을 명확히 정리해본 뒤에, 여러 가지 사건들 사이에 나타나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을 명확하게 명명해줘야 합니다. ‘스트레스’라고 통칭되는 마음속 심란함이 과연 어떤 이름의 감정인가를 정해주어야 합니다. ‘분노’ ‘수치심’ ‘슬픔’ ‘외로움’ ‘불안함’ ‘두려움’과 같은 기본적인 일차 감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그중 어떤 감정이 유독 반복되어 나타나는지, 어떤 감정에게 내가 유독 취약한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또 매번 반복되는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나의 ‘생각’은 무엇인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핵심은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사람과 배경만 바뀐 채, 같은 주제의 패턴으로 나타나는 어떤 ‘문장’을 찾을 수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실패할 거야’ ‘나는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켜’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할 거야’와 같은 문장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나의 약점이 드러나면 안 돼’ ‘나의 실체가 드러나면 안 돼’ 같은 두려움일 수도 있겠고요.
그러고 난 뒤에 그 작동되고 있는 패턴이 지금의 상황에 정말로 맞는지, ‘진짜 합리적인지’를 객관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과연 몇% 나 합리적인지 점수를 매기며 스스로를 반박해보기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야만 나를 무너트리는 나 스스로의 부적응적인 패턴을 반박하는 훈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감정을 적어 본다’라는 것은 사실 이렇게나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조금은 분석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를 다독여준다’라는 것 역시 나의 핵심 감정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질문자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작업들에도 이런 디테일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조금은 교과서 같은 이야기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조금 더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드려보고자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반복되고 계속 지치기만 하는 그 두 번째 이유를 제가 조금 더 한 발 앞서 나가서 넘겨짚어보겠습니다.
질문자님께서는 ‘직장생활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다’ ‘사람들 때문에 감정 소모가 심하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려되는 바는 질문자님께서 마음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이 너무 바깥을 향해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평온한 나의 마음에 다른 사람들이 자꾸만 돌을 던져서 너무 심란해지고 매번 나는 그것을 뒤처리하느라 진이 빠진다’는 식의 생각처럼 말이지요.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건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을 서로 주고받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관계,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할 때는 감정과 감정이 오갈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은 대화의 주제뿐 아니라 얼굴과 생김새, 옷차림, 말투, 목소리, 어조, 분위기 같은 모든 면면에서 전해지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감정과 생각이 서로 오가게 됩니다. 서로 뒤섞이게 되지요. 누군가를 만나고 왔다는 것은 나의 일부분에 그 사람을 조금씩 묻히고 왔다는 뜻이며 같은 의미로 상대방 역시 나를 조금 묻히고 갔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조금씩 조금씩 마음과 마음이 섞이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만날 때에는 나의 마음이 조금씩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의식하고 있지 못하던 나의 감정과 생각들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내 안에 있지만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마음이 튀어나와서, 밖에서 들어온 진짜로 내 것이 아니던 상대방의 마음과 함께 뒤섞이지요. 낯선 마음들이 마구 꿈틀거리는데 이게 원래 나한테 있던 것인지, 밖에서 들어온 것인지를 혼동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만나고 온 뒤에도 한동안 뭔가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혼동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미 나의 무의식 속에 해결되지 못한 깊은 갈등이 부글거리고 있다면, 이 과정은 한층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에 혼자만 있을 때 그 갈등은 무의식 속으로 잘 억눌리고 숨겨져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평온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마음이 들어와 그 수면을 일렁이게 만들면 마음속의 문제가 폭발하듯 터져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심란함이 전부 밖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착각하게 될 수도 있지요. 사실은 내가 의식하지 못했을 뿐 나의 수면 밑에서 오랫동안 끓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난 것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지금은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이제 더 나이가 들어 사람 구실을 못하면 자살이 타의적 의무가 될 것 같다”라는 질문자님의 말이 저는 서글프게 보입니다. 어쩌면 바로 이 문장이 질문자님 마음속에 숨은 오래된 갈등을 엿보이게 만드는 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통은 자살을 그렇게 표현하지 않으니까요. ‘자살’이라는 끔찍한 결론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짧은 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을 제가 지레짐작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질문자님 마음속에 커다란 문제의 근원이 숨어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것이 매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방법 역시도 첫 번째 말씀드렸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를 구조화하고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 분석해보아야 합니다.
다만, 말 그대로 무의식-내가 들여다보지 못하는 나의 마음속에 있는 부분이기에 혼자서 그것을 처리하기란 훨씬 더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 커다란 갈등이 무의식 속에 숨어버린 근본적인 이유부터가 그것을 들여다보기가 너무 괴롭고 두려운 일이라서이기도 할 테고요.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알지 못하는 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안내자와 조력자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어려움이 계속되어 막막함에 지쳐가기만 한다면 부디 정신건강의학과의 문턱을 넘어 도움을 청하기를 주저하시지 않기를 권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처럼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힘을 많이 얻습니다. 정성스런 상담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 자신에게 궁금했던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돈을 받고 그 일을 하는거라고 심슨에서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