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사연)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두 분이 많이 다투셨어요.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어머니를 심하게 때리셔서 이웃집 신고로 경찰이 집에 온 적도 있었고 자주 그러시다 보니 트라우마처럼 성인 남성이 고함을 지르거나 조금만 심기가 불편해 보여도 눈물부터 나고 불안감이 크게 느껴져요. 아버지는 저희를 때리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저에게만 신경질적이고 기분이 안 좋으시면 손찌검에 언어 폭행도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랑 어머니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밑에 동생들이 중학교,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이혼하자고 말한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어요, 제가 대학교에 진학한 후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하였는데 어머니도 많이 힘드셨던 것 같아요. 항상 술 취해 울면서 전화가 와서 죽고 싶다, 살기 싫다라는 말과 언어 폭행도 많이 하셨어요. 부담감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결국 저도 술을 마시고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대학 생활은 엉망이었어요. 수업을 자주 빼먹고 항상 술을 마시고 건강도 많이 안 좋아졌고 졸업도 겨우 했습니다. 그리고 본가를 돌아오니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서 어머니께서 사촌분께 부탁드린 회사로 억지로 출근하게 됐어요.
현재도 다니고 있지만, 회사생활도 너무 힘들었어요. 상사 중에 감정 기복이 심하고 항상 윽박지르며 업무를 하시는 분이 계셔서 회사에서도 자주 울고 집에서도 하소연하다 자주 울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참고 다니라고 너만 힘든 거 아니라고 일을 그만두면 생활을 어찌하냐며 그러셔서 미칠 거 같은 기분으로 다녔어요, 밤에 잠이 들 때는 심장이 쿵쾅대며 뛰고 잠에 못 들어서 술 마시고 잠든 적도 많았어요. 현재 그 상사분이 그만두셔서 나아졌지만, 이제는 어머니의 모습들이 너무 진저리가 나고 화가 나 죽겠어요.
그렇게 학생 때는 저를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대하다가 돈을 버니까 딸밖에 없다며 남들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하는 행동이 너무 화가 나요. 어머니는 돈이 없다고 하시면서 자기 취미 생활은 다 즐기시고 제 카드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5년 넘게 근무했지만 모아둔 돈도 없고 대출 빚까지 생겨버렸어요. 어머니도 일을 하시긴 하지만 집 대출금을 못 갚아 이제 집도 경매에 넘어갔어요.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나고 어머니랑 연을 끊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하지만 또 엄마가 안쓰러워요. 저도 엄마랑 대화로 풀어보려 했지만, 항상 마지막엔 싸움으로 끝이 나요. 저도 이런 상황 때문인지 조금만 대화가 안 통해도 속에서 화가 올라와서 소리를 지르고 울어요. 이제 대화하기도 싫고 해결되지 않는 이 상황만이 제 가슴을 답답하게 해요.
사회생활할 때는 세상 밝은 척 행동하지만, 집에 들어오면 덮쳐오는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너무 삶을 힘들게 하네요.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의학신문 정희주입니다.
보내주신 사연 잘 읽어보았습니다. 담담히 적어주셨지만 어린 시절 힘들었던 기억과 현재의 고통스러운 마음이 문장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먼저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트라우마란 개인이 가진 심리적 기능을 압도하는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주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트라우마 중에서도 가까운 가족에게 경험하는 애착 트라우마는 가장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애착 트라우마는 심리적 상처를 주는 것에 더해서 그 상처를 위로하고 지지해줄 보호자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트라우마는 누적되는 특징이 있어, 일회적 사건보다 긴 시간의 반복적인 상처가 더 심한 손상을 일으킵니다. 글쓴이분이 겪으신 어린 시절의 반복적인 폭언과 손찌검, 아버지의 폭력을 가벼이 취급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사건과 그때의 감정은 온전히 처리되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 파편화되어 저장됩니다. 그러다 심리적으로 지쳤을 때 혹은 과거와 유사한 상황을 경험할 때 불현듯 떠올라 자신을 괴롭힙니다. 글쓴이 분이 성인 남성을 유난히 두려워하는 것도, 술을 마시며 하루를 견디는 것도, 문득 덮쳐오는 우울감과 불안감도 결국 글쓴이 분이 겪어온 트라우마의 영향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불안함은 글쓴이분의 잘못이 절대 아니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은 충분히 치유될 수 있지만, 치료를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트라우마 상황에 노출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정신적 외상을 경험하고 있다면 어떠한 상담이나 약물치료를 하여도 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트라우마를 주는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글쓴이분의 현재 상황을 살피자면 엄밀하게 지금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어린 시절만큼의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심각하게 경계를 침해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그러합니다. 한쪽은 대출을 받아가며 뒷바라지를 하고 다른 한쪽은 취미를 즐기며 카드를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정상적인 인간관계보다는 심각한 권리의 침해에 가깝습니다. 타인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사용하고 다른 한편 남들에게 보여주기 용으로 사용하는 상황은 심리적 착취입니다. 타인에게 권리를 침해당하고 일방적으로 이용당한다면 이는 트라우마가 지속되는 상황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답을 예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글쓴이분이 자신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스스로를 지키려는 태도와 행동이 필요합니다. 지금이 상황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고, 현재의 트라우마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처럼 회복으로 나아가는 길은 요원 해집니다.
물론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 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적어주신 내용으로만 본다면 죄책감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곧 연을 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금과 같은 관계는 절대로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자기주장을 하는 단호함이야말로 가족의 인연을 이어나가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기적인 행동도 아닙니다. 지금과 같은 일방적인 관계는 부모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어서까지 자식에게 의존하는 부모의 삶은 어쩌면 그런 부모를 부양하는 자녀의 삶보다 비참할 수 있습니다.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심리적으로 분리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물리적, 금전적인 영역을 명확히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문제가 해결된다면 이후에 우울감, 무기력감, 삶에 대한 회의감 등의 고통스러운 감정은 생각보다 쉽게 나아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레 스스로 회복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정신과에서의 약간의 도움이면 충분합니다. 저의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봅니다.
![]() |
* * *
정신의학신문 마음건강검사를 받아보세요.
(상담 비용 50% 지원 및 검사 결과지 제공)
▶ 자세히보기
관련기사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살피려는 노력을 하기, 그리고 작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의식적으로’ 목표에 대해 보상하기. 중요한 내용을 많이 배워갑니다!"
"근육을 키운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실천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