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어렸을 때 박완서 작가님의 단편소설 중 '옥상의 민들레꽃'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이 이야기를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줄거리를 말씀드리자면 주인공은 어린아이이고 한 집안의 막내인데 '궁전아파트'라는 아파트에서 노인 자살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아파트 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린 주인공이 엄마와 주민들에게 '옥상의 민들레꽃' 이야기를 하려다 어리다는 이유로 그냥 무시당하는데

그 이야기가 뭐냐면 주인공이 어느 어버이날 부모님께서 형과 누나의 예쁜 선물은 소중히 간직하면서 자신이 선물을 드리기도 전에 형과 누나가 그냥 어버이날 축하 노래를 불렀고 그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나중에 보니 주인공의 소박한, 상대적으로 초라한 선물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고, 그 사이에 주인공은 엄마가 자신만 창피하게도 아이가 셋이라며 막내에 대해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담스럽다는 식으로 안 좋은 이야기로 통화하는 걸 듣게 돼요. 그래서 아이가 기분이 상해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날 밤에 옥상에 올라갔다가 땅 위에 피어있는 민들레꽃 한 송이를 보고 그 속에서도 생명이 피어나는구나 하고 생각해서 떨어지겠다는 생각을 고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래서 그 아이는 그 대책회의 날에 주민들에게 노인들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건 쇠창살이 아니라 민들레꽃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무시당하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문가분들의 입장에서, 실제로 이런 일로 사람이 자살 충동이 일어나긴 하나요? 그것도 학교에 안 다니고 반상회의 때도 부모님 옆에 붙어있는 어린아이가. 그리고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가정하면, 이후에 이 아이가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쳐 우울증 등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볼 수 있나요? 미취학인데 옥상에서 떨어지겠다는 생각까지 한 걸로 봐서요.

실제로 현대인 중 생각보다 많은 비율이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고 알고 있는데(실제로 이를 행하진 않더라도) 보통 왜 우울증이나 자살 이런 거 하면 가정불화, 왕따, 폭력 등등의 환경에 어렸을 때부터 노출되어 있었다거나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심각한 일을 겪는 건 아닐 텐데 이 책 속의 아이처럼 폭력 등 심각한 사건을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이나 자살 생각이 들 수가 있나요?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좋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사진_픽셀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의학신문입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을 내용으로 질문을 주셨군요. 아주 예전에 읽어보았던 소설인데 질문자님 덕분에 다시 한번 읽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환자분들을 많이 만나보고 난 뒤에 다시 읽게 되니 저로서도 새로운 경험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문학작품 속 주인공을 주제로 정신분석적 견해를 풀거나 심리적 분석을 시도하는 사례는 아주 예전부터 자주 있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가상 속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심리 분석이 그만큼 사람들의 공감을 사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다만, 저는 그보다 질문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옥상 위의 민들레꽃은 유명한 작품인 만큼 소설을 다룬 논평이 무척 많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펼치고 있지요. 그런데 그중 질문자님은 왜 이런 궁금증이 마음에 남으셨을까요?

"실제로 이런 일로 사람이 자살 충동이 일어나긴 하나요?"
"심각한 사건을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이나 자살 생각이 들 수가 있나요?"

라는 궁금증 말입니다.

 

문학작품은 일종의 간접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각자의 삶과 생각이 투영된 주관적 경험, 내면적 경험입니다. 같은 작품을 보아도 사람마다 관심이 끌리는 포인트는 각기 다른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그렇다면 질문자님께서 '옥상 위의 민들레꽃'을 읽으며 유독 그 궁금증이 마음속에 맴돌게 된 것은 과연 질문자님 내면의 어떤 것이 투영된 결과일까요? 심지어 여기에 이렇게 질문을 올리시게 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으니 말입니다.

 

먼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자살 생각을 불러일으키면 안 될 사건' 같은 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건이라도 어떤 상황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자살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모든 사건과 모든 상황은 각자의 내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객관적인 상황 묘사만 가지고 '그것이 자살할만한 사건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괴로웠다는 사실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살을 시도할만한 상황이었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입니다.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 그 괴로움입니다.

 

괴롭고 싶어서 괴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또, 괴로워도 될 자격, 괴로우면 안 될 자격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살 생각을 해도 되고, 하면 안 되고 하는 기준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그 괴로움보다는 '자살'이라는 것 자체에 더 집중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왜 자살 생각을 했느냐."
"자살할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으냐."
"자살한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느냐."
"아무리 그래도 자살을 하면 안 되지."

이 질문들에는 누군가를 자살로까지 몰고 간 괴로움이 빠져 있습니다. 그 괴로움에 대한 공감이 빠져 있습니다.

옥상의 민들레꽃 속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이가 자살을 생각할만한 상황이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보다는 그 아이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소설 속 어른들이 '자살'에 몰두하여 놓치고 있던 것도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요. 사실 아이는 시멘트 틈 사이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의 작은 위로만으로도 죽음을 돌이킬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질문자님께서 유독 그 질문에 마음이 쓰이신 이유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아이처럼 별것 아닌 듯한 이유로 자살까지 하는 게 정말 흔한 것인가?'
'이 아이처럼 자살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일까?'
'이 아이는 비정상인가? 병이 있는 건가?'

와 같은 의문들이 남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문자님의 어떤 경험과 어떤 내면이 투영된 의문일까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의 자살 사고는 위로받기 어렵습니다. 공감받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상황과 자살이라는 사건만으로 자꾸 무언가를 판단하려고 합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무언가를 개입하려 합니다. 사실 정말 필요한 것은 민들레꽃 한 송이만큼의 위로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듣지 못한 질문자님의 마음을 자세히 넘겨짚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질문자님께서 이 작품을 계기로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좋은 기회를 가지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도움,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하실 수도 있겠지요. 상담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문학작품에 매료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렇게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질문자님의 마음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응원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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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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