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강남 푸른 정신과, 신재현 전문의]
우리 몸과 마음은 분명 지쳐 있습니다
2021년, 소의 해가 소걸음처럼 느릿하지만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미 새해로 접어들어 며칠 지난 시점입니다. 저마다 새해의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송구영신(送舊迎新), 묵은 것들을 흘려 떠나보내고 희망찬 것들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계실 테지요.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들썩였던 한 해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었지요. 그로 인해 삶의 형태 또한 많이 달라진 시기였습니다. 마스크와 손 세정제가 삶의 하나로 자리 잡기도 했고, 오프라인을 통한 만남보다 온라인을 통한 만남이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직장인들은 업무 환경이 재택근무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바뀐 삶의 모습은 불편함을 유발할 수밖에요. 해보지 않았던 것, 처음 접해 보는 것들을 어쩔 수 없이 해내야 하는 상황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낯섦에 대해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낍니다. 뇌에서는 삶에서 일어나는 잡음, 갑작스러운 변화를 생존에 위험이 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인식합니다. 과거 우리 조상인 원시인이 먼 곳에 있는 낯선 그림자를 본 순간 최대한 경계와 긴장을 했던 것처럼, 인간의 유전적 정보에는 생존을 위한 안전장치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낯섦을 보는 순간, 당장 도망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보호 본능에 속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에 못지않게, 우리는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 또한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반응적 조건화(respondent conditioning, 고전적 조건화)는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게 하고,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는 그 상황에 반응하는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피드백을 받아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인간을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습관화(habituation)는 반복을 통해 그 불편함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기도 하고요. 이런 과정들을 통해, 결국 우리는 삶의 다양한 변수를 우리 삶 안에 통합시키게 됩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한두 가지의 변화라면 우리의 뇌는 이내 경계를 풀고 적응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겠지만, 2020년의 코로나 사태처럼 내 삶의 바탕 자체가 바뀌어 버린 상황은 끊임없는 경계와 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 노력에는 에너지가 따르기 마련이고요. 당연히 내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뀐 상황에 적응하느라 지친 나에게 휴식과 여유를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021년을 맞이하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새로운 시절을 맞이하는 기쁨을 누리기보다, 위로와 휴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이 사회는 온전한 휴식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말이든 휴일이든, 걱정거리는 항상 가득하지요. 그러니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오늘 얼마간은 온전히 쉬겠다.’는 결심을요. 그렇게 경계 태세인 뇌에게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는 100% 안전하니 쉬어도 된다는 신호를요. 삶에서 일정한 휴식을 허락해야 합니다. 참 안타깝지만 이 시절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휴식을 맞이하는 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한 해의 의미를 ‘균형 있게’ 되새긴다는 것
“삼재(三災)야 삼재.”
“정말 재수 없는 한 해였어,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코로나가 터질 게 뭐람.”
“2020년은 진짜 내 삶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
2020년은 세계사에서, 혹은 우리 삶의 역사에서도 정말 힘들었던 한 해로 기록될 것 같아요. 직장인, 자영업자, 학생, 가정주부 할 것 없이 모든 이의 삶이 낯선 환경에 노출되어 불편했었으니까요. 그러니 새해를 맞이하며 2020년은 삶에서 정말 지워 버리고 싶은 한 해로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인지 오류 중 명명하기(labeling)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자신을 한 가지로 칭한다면, 이를테면 바보, 멍청이, 쓰레기와 같은 부정적인 꼬리표를 붙이다면, 자신 그 자체가 그 단어로 인식되는 걸 말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2020년 한 해가 힘든 시기였지만, 분명 여느 해처럼 좋은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이 날줄과 씨줄처럼 얽힌 시간이었을 겁니다. 힘든 한 해로만 받아들인다면 행복하고 즐거웠던 찰나의 순간은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진부한 비유겠지만, 컵에 물이 절반쯤 담겨 있다 생각해 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물이 반밖에 없네?’라는 식의 부정적이고 비관적 관점입니다. 당연히 나머지 하나는 ‘물이 반이나 남았구나!’하는 긍정적 관점이고요. 통상적으로 이 이야기에서는 ‘삶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식의 진부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야기는 따로 있을 것 같습니다. 물이 반 담긴 컵을 보며 이야기하는 사람들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테지요. 다들 자신이 살아온 삶의 맥락에 따라 눈앞의 것들을 받아들이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이 컵을 몇 발자국 뒤로 가 살펴볼 수 있다면, 이 컵을 바라보는 데도 여러 관점이 함께 존재할 수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잠시 여유를 찾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는 용기를 내는 데는 연습이 필요하지만요.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상황이 실은 여러 측면이 있다는 것. 그러니 우리 삶에서 온전한 절망은 없다는 것. 코로나로 무너졌던 삶에서도 분명 즐겁고 행복한 순간은 존재했다는 것. 절망 안에서도 길어 올릴 수 있는 희망의 조각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 나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한 상황에서도 다양한 측면을 발견하고, 이를 나의 인생에 균형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2020년을 흘려보낼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을까요?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닌 발견하는 거라고 하니까요.
부디 2021년에는 힘듦에 밟혀 있는 소중한 행복을 발견하는 기회가 찾아오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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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나를 살피는 기술>, <어른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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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만나고나서 분노를 좀더 잘 다루게 된 것 같아요"
"신재현 선생님의 따뜻한 조언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어요"
"지방이라 멀어서 못 가지만 여건이 되면 찾아가고픈 제 마음속의 주치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