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정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어느날 아침 인터넷 신문에 가슴아픈 기사가 떴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기업 직원이 업무스트레스로 투신을 했다는 기사였다.

기사 밑에는 그 정도면 그냥 회사를 그만두지 왜 목숨을 버리냐는 안타까운 댓글들이 달려있었다.

 

왜 그는 때려치우지 못했을까? 사정을 알 수는 없다.

단, 역학연구에 따르면 자살의 80~90%가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과적 질환과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추정해보면, 혹시 우울증을 겪고 있어 뇌신경전달물질의 변화와 관련된 터널 비전(tunnel vision: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좁은 시야로 판단하게 되는 현상)및 결정장애 증상, 부정적 인지 등이 관련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만두라는 말을 쉽게 할 수는 있지만, 실제 '그만두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는 상담 때마다 느끼게 된다.

가족들, 친구들, 주변 상황 다 따지다 보면 그냥 머물러 있는 게, 그저 죽은 듯이 사는 게 정답인 것처럼 느껴지니까 말이다.

 

나도 앞길이 창창한(남들이 보기에) 대기업 연구원을 그만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은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정말 의욕도 없고, 주어진 일만 하면서, 불평만 늘어난, 매너리즘에 빠진 회사원이 되었을 것 같다.

 

사진_픽사베이

 

하지만, 부모님을 포함한 주위의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견디는 것,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내는 것이 내게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의대 편입 초반에는 그만두고 싶은 생각으로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했던 이유는 의학공부를 할 때는 내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옆에서 도와준 분들 때문에.

 

그만두어서 잘했다고 느낀 것은 또 있다.

고3 때 진학 특별반을 모아서 학교에서 합숙을 시킨 적이 있었다. 저녁에는 보충수업을 하면서 수학선생님이 일본 정석을 풀어주시고 했는데, 2주 정도 해봤는데 너무 힘들고 재미도 없었다.

그때 나는 과감히 그만두겠다고 얘기했고 배신자가 된 기분을 견뎌야 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 반은 큰 효과는 못 거둔 채 폐지되어, 일찍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2 때도 반강제적으로 실시하던 보충수업을 거부했다. 반에서 나 혼자였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 2번 갈아타고, 시간도 1시간 넘게 걸렸는데, 방학 때까지 그 고생을 하자니 끔찍했다.

선생님께서는 매우 화난 목소리로 "방학 끝나고 성적 떨어지면 큰일 날 줄 알아!"라고 하셨지만, 그때 실컷 놀았던 기억은 지금도 너무 흐뭇하다.

 

그만두는 게 꼭 잘 하는 건 아니다. 나도 그냥 연구원으로 살걸 후회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만둬야 한다고 느낄 때 그 선택의 키는 꼭 '나'에게 있어야 한다.

그 선택을 할 수 없을 때, 선택권을 빼앗겼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불행해지는 것이다

 

지치면 안 돼. 그러면 수레바퀴 밑에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중에서

 

헤르만 헤세는 어린 시절 명문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1년 만에 그만둔 뒤 공장을 전전하며 고생했다고 한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를 썼다. 위의 문구에서 그가 느꼈던 공포가 느껴지는 것 같다.

수레바퀴에 깔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계속 일하다 보면 결국 지칠 수밖에 없다. 두려울 정도라면 그냥 빠져나오자.

 

사진_픽사베이

 

아인슈타인도 명문학교에 적응 못하고 자퇴한 뒤 방황하다 자신을 찾았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도 부모님의 기대에 맞춰 법률학교에 가고, 취직을 했으나 과감히 그만두고 음악을 선택하여 오늘의 명곡들을 남겼다.

 

너무 먼 나라 얘기라고?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응답하라" 시리즈를 연출한 신원호 PD도 사실 나와 같은 화학공학과 출신이다.

가수인 루시드 폴도 그렇다.

우리는 모두 그만두었다.

 

때려치울 용기를 내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만둘 용기를 낼 때 의외의 해결 통로가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공의 시절 그만두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뒤늦게 편입해 육아를 병행하며 전공의 수련을 받던 시절, 밤 11시가 넘도록 암병동을 떠돌며 컨설트를 보고, 주치의 업무, 당직 스케줄에, 발표 스케줄까지 살인적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Burn-out 되어가던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찍히고 욕먹을 각오를 하고 용기 내어 의국장에게 상담을 요청했고, 의외의 조정이 이루어져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때 그냥 있었더라면 나는 아마 공황장애나 심한 탈진 증상으로 그만두었을 것 같다.

 

힘든 세상에 버텨야 할 때가 많고, 버티는 것이 미덕인 때도 많다.

하지만, 죽을 정도로 너무 힘들다면 그냥 때려치우자. 당신은 이미 최선을 다했으니까.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 塞翁之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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