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손정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A씨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3살 여대생입니다. 저는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 게 고민입니다. 학교도, 취업도 싫고 여행을 가면 즐겁지만 그 순간 뿐이에요. 부모님을 떠올리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냥 생각만 할 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아요.

 

제 예전 얘기를 좀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저는 고등학교 때 성적이 나쁘지 않아서 서울의 대학교를 갈까 했지만, 지방의 공무원인 부모님은 기숙사비, 학비, 생활비를 보태주실 여력이 없었어요. 결국 고민 끝에 지방 국립대 공대에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전문대 식품 영양학과에 가서 영양사 준비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여자 직업으로는 좋다구요. 결국 양쪽에 지원해서 모두 붙었는데, 뭐하러 4년 동안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공부하냐며 전문대를 가라고 종용하셨어요. 늦게 공부를 시작한 언니 학비와 생활비도 대줘야 하고, 동생도 고3인데 곧 대학 보내면 돈이 드니, 저는 일찍 공부를 마치고 취업해서 돈을 벌라는 얘기였죠.

 

사진_픽셀

 

결국 장학금을 받고 지방 전문대에 들어갔는데, 후회됩니다. 공부에 집중이 안 되고 하기도 싫고... 결국 1년간 휴학 했다가 복학했고, 지금도 시험기간인데 도서관에 가서 인문학 책만 하루 종일 읽다가 왔네요. 사실 지금도 4년제 대학으로 편입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큰데, 막상 가면 별거 없다고 다들 그러더라구요. 교양도 듣고 여러 가지 배워 보고, 캠퍼스 생활도 즐기고 싶고 욕심 부리는 거겠죠.

 

요즘은 의욕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안 생기고, 전에는 매일 만났던 친구들도 자꾸 피하게 돼요. 그래서 기분전환도 하고 다른 생각 할 시간을 안 만들려고 끊임없이 여행을 다니고 있어요. 휴학한 1년 사이에 외국 7곳을 다녀왔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이렇게 여행을 가도 예전 같은 설렘도 없이 그냥 잠깐 놀다 왔구나 하는 느낌이고, 부모님 힘들게 버신 돈을 내가 너무 무의미하게 썼나 하고 죄책감도 듭니다(카드를 너무 많이 써서 어제도 혼났구요). 주위 친구들은 부모님한테 감사한 줄 알라는데, 저는 이 공허한 마음이 안 채워져 힘들기만 해요. 휴학을 다시 하고 조금 더 생각해볼까 했지만 부모님은 이제껏 든 돈이며 시간이 아까우니 참고 졸업하라고 하셔요. 나중에 이 길로 취업 안 해도 배워두면 쓰게 될 곳은 있을 거라구요.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바뀌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뭘 해야 한다는 강박감은 있지만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구요. 가족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부모님한테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도 힘들어요), 대학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그냥 철이 덜 든건지... 제가 마음의 갈피를 못 잡은 채 이렇게 지내고 있는 건 어떤 이유가 있어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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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이 고민이 돼 사연을 주셨는데, 사실 좀 더 복잡하고 오래된 마음 속 감정들이 지금의 괴로움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부모님 권유대로 취업을 위해 선택한 학교인 터라 동기들과 그다지 어울리고 싶지 않고, 4년제 대학으로 옮겨 캠퍼스 생활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해요. 주위 다른 친구들과 비교가 되기도 할 것이고, 여러 모로 자존감이 낮아지기 쉬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로를 선택한 것이 결구 본인의 결정이었으며, 지금으로선 가족 사정 등 여러 여건 때문에 당장 되돌리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고요. 이렇게 이러기도 저러기도 힘든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우리 심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어기제를 사용하게 됩니다.

 

A님의 사연 내용에서 방어기제가 연관되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가령 휴학 중에 7차례의 해외 여행을 다녀오거나, 시험기간에 인문학 책을 읽으며 지내는 것은 ‘회피’ 기제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좁은 의미의 ‘회피‘는 스트레스가 되는 상황이나 대상, 생각을 피해버리는 것인데, 넓은 개념으로는 나를 괴롭게 만들 수 있는 내적 갈등을 피하기 위한 모든 방법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잦은 여행을 반복하고, 하기 싫은 학과 공부 대신 인문학 책을 읽는 것들도 여기 포함될 수 있겠죠. 이런 행동들을 하다 보면 죄책감과 부담을 느끼기가 쉬운데, “새로운 경험을 쌓고 기분 전환을 위해 여행을 간다”거나, “교양을 쌓기 위해 인문학 책을 읽는다”는 생각으로 ’합리화‘하면서 자신을 납득시키며 명분을 부여하고 있을 수도 있구요.

 

사진_픽셀

 

일상의 수많은 상황에서 겪게 되는 자존감의 저하와 같은 심리적 데미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누구나 ’회피‘와 ’합리화‘를 포함한 여러 방어기제들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한 스트레스와 고통 상황에서 이러한 방어기제들이 내 마음을 지키고 회복하는 데에 일시적인 효과는 있겠지만, 미성숙한 방법으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시도만 계속된다면 결국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방해하고, 처음의 효과마저도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A님께서 이제는 여행을 다녀도 이전만큼 즐거움, 해방감을 느끼기 힘들다고 한 것처럼요.

 

조금 다른 측면에서, A님의 갈피를 잡기 힘든 마음 아래에는 부모님에 대한 여러 감정이 영향을 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연 글 전반에서 A님의 ‘부모님에게 부담을 드려선 안되고, 지금의 내 모습이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마음이 느껴지는데요. ‘착한 둘째‘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릴 때부터 형성된 초자아(가치관, 도덕심 등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심리구조랍니다)의 일부로 자리 잡아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또 한편으로 지금까지의 일을 돌이켜보면, A님 마음 한 켠에 ‘나는 언니와 동생에 대한 지원을 이유로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원하지 않는 진로까지 선택하게 돼서 고통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생겨나는 원망감, 분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실제로 그럴만한 상황인 것 같구요). 이렇게 부모님을 향한 죄책감과 원망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계속되는데 현실적으로 해소할 방법은 찾기 어려운 채로 지내다 보니, 스스로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쓰게 된 건 아닐까라는 추측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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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A님의 힘든 상황에 여러 조언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명쾌한 해답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이라도 회피하는 패턴을 그만 두고,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내서 그것에 온 힘을 쏟아보는 것이 정답이 되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겠죠. 그런데 사실, 자신이 꿈꾸고 계획한 길을 정확히 따라가서 성공을 이뤄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나를 제외한 내 주위의 모두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해서 확신을 가지고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요. 목적지가 뚜렷해야만 걷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일단 앞에 보이는 길로 걷기 시작하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제자리에 멈춰 서서 고민하고 방황할 땐 보이지 않던 다른 길이 보일 수도 있어요(비슷한 내용의 가사를 담은 이승철의 ‘아마추어’라는 노래를 한번 들어보시면 좋겠어요). 나만 뒤처지지 않나 쫓기고 조급해 할 필요도 없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 지금 앞에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A님은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크다고 말씀하지만, 그와 별개로 앞서 말했듯 내가 원한 길을 막은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 위, 아래 형제들 사이에 끼여서 본인만 손해 보는 느낌, 박탈감 등이 분명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계속 A님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오랫동안 묵혀 놓은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환기시키고 나면 감정 기복도 줄어들고 마음이 한결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까운 사람도 좋고, 전문적인 상담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방황했던 1년간의 시간을 너무 아까워하고 후회하지 마세요. 그런 시간을 딛고 또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거고,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A님만의 색깔을 만들어 주는 거니까요. 20대 초반, 인생의 아름다운 시기에 여행뿐 아닌 많은 경험들 하면서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도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힘내세요!

 

 

팟캐스트 뇌부자들[13화 part 2-1]  “회피, 합리화” 에피소드

팟빵: http://www.podbbang.com/ch/13552?e=2240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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