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변해버린 아버지" 에피소드 - 팟캐스트 뇌부자들 [13화 Part 2-2]

[정신의학신문 : 김지용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H씨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30대 여성입니다.

저희 아빠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아빠는 성격이 강하신 편입니다. 자수성가하신 분이라 그런지 자기애라고 할까, 그런 것도 좀 강하시고요. 그래서 저희 집에선 언제나 아빠가 대장이고 모든 주도권을 쥐고 계십니다.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사회에서도 그러셨었고요. 그런데 이제 연세가 드시면서 사회생활을 많이 정리하고 계시다 보니 약간 우울해 보이세요. 나이가 들었으니 일을 정리하고 싶다고 하시면서도 동시에 ‘왜 이렇게 늙어 버려서 일을 못 하냐’라며 한탄하기도 하시고요.

 

사진_픽셀

 

최근 들어 아빠의 감정은 늘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화가 나 있거나, 기분이 아주 좋거나. 화가 나면 인상 쓴 표정에 말씀도 잘 안 하시고, 모든 일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며 가족들을 불안하게 만드십니다. 가족들 누구도 아빠의 화난 이유를 모르니 풀어드릴 수도 없고, 대화를 하려해도 날카롭게 행동하시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화가 풀리고 기분이 좋아지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희 가족이 즐거운 것도 아닙니다. 이미 아빠에게 상처받은 마음이 상해 있는데, 아빠는 본인 기분이 좋으니 당연히 저희도 그러길 바라며 기쁜 감정을 강요합니다. 여기서 감정 코드가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또 바로 삐짐 모드로 들어가십니다.  

 

화가 풀린 후에 기분이 과하게 좋아지면 말씀도 많이 하시고, 모든 일을 가족들과 함께 하려 하십니다. 방에서 일하거나 자고 있는 저희를 불러 모아 같이 TV를 보자고 하시고, 식사하실 때에도 전원 불러와서 앉힙니다. 밥을 안 먹을 사람도 무조건 앉아있어야 합니다. 식사 준비 중에도 끊임없이 부엌에 오셔서 간섭하시며 말하시는데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일에 바빠 거의 집에 없으셨으니 이제 은퇴를 앞두고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가끔은 그냥 삐짐 모드로 계셨으면 좋겠단 생각도 들 정도네요.

 

이러다보니 요즘 저희 가족은 거의 모든 에너지를 아빠의 기분을 살피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도 눈치 보며 조심스럽게 하고, 어떤 장단에 맞출지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특히 엄마가 너무 힘들어 하세요. 지금은 저랑 수다도 떨고 대화를 하며 버티시는데, 제가 곧 결혼하고 나면 혼자 감당하셔야 할 텐데..걱정이 많습니다.

 

사진_픽셀

 

엄마는 아빠의 모습이 혹시 우울증이나 치매 초기 증상은 아닐지 걱정하시며 병원이라도 가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아빠는 정신과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나 큰 게 예전에 부부 상담을 권유 받았을 때도 정신병자나 가는 곳 아니냐며 역정을 내셨거든요. 나이가 들면서 변해버린 아빠… 이런 아빠를 미워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아빠의 이런 증상이 나쁜 병으로 인한 것은 아니겠죠? 상담을 받아야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병원을 가야 할까요? 도와주세요.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입니다.

‘은퇴하고 나니 빨리 늙는 것 같다, 1년 사이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졌다’ 는 등의 이야기를 진료실에서 듣게될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우울감, 무기력, 감정의 기복 같은 정신과적 증상과 소화불량, 두통 등의 신체 증상들을 호소하기도 하시죠. 이런 경우들을 ‘은퇴 증후군’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아버지께서도 이에 해당하시지 않을까 싶네요. H씨 아버지처럼 가족과의 시간도 없이 평생을 일로만 바쁘게 지내오시던 분들은 은퇴 과정에서의 급작스런 자기 역할 변화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실 수 밖에 없거든요.

 

심리학자 라이카르트란 분은 은퇴를 받아들이는 유형을 다섯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로 가장 이상적인 ‘성숙’형은 큰 어려움 없이 자신의 나이 들어감을 받아들이고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지내는 분들이 속하는 타입입니다.

두 번째로 책임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차분한 삶을 살고 싶었던 욕구를 충족하는 ‘은둔’형이 있고요. 세 번째로는 ‘무장’형이 있습니다. 소외되는 것 같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은퇴 후에도 다른 사회 활동을 끊임없이 하려고 노력하는 타입이죠.  

다음으로는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실패나 불행의 원인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면서 은퇴 후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노’형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학’형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분노형과 마찬가지지만 그 원인을 본인으로 돌리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사진_픽셀

 

H씨 아버지의 경우 저희가 속마음을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사연의 내용으로 볼 때 ‘분노’형과 ‘무장’형의 모습들을 일부분씩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분노를 자주 보이시는데, 본인께서 성에 차지 않거나 못 마땅한 점을 가족들이 알아서 채워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시는 모습이 ‘분노’형에 해당되겠네요. 또한 전에 없이 가족들과 함께 활동과 감정을 공유하면서 일체감을 확인하려는 모습은 심리적 소외감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어 ‘무장’형의 모습도 보이고 계신 것 같고요.

 

이처럼 아버지께서 사회 생활을 정리하는 것을 다른 분들보다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시는 데에는 H씨께서도 언급한 자기애성 성격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자수성가하신 분들은 자기애의 근본에 사회적, 사업적 성공이 위치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버지께서 사업들을 정리하고 사회활동을 줄여 나가는 과정은 말 그대로 자기애를 깎고 자존감에 큰 상처를 받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 발생한 우울, 무기력, 짜증 같은 것들이 가족 분들을 힘들고 귀찮게 하기도 했던 것이죠.

또한 ‘사회적인 위치는 끝나버렸지만 난 여전히 집에서 가장 높은, 존중받아야 될 사람이야’라는 생각으로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전보다 더 가족 분들을 통솔하려는 모습을 보이셨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집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받고 존중받는다고 느낄 때는 기분이 좋아졌다가도, 상처받은 자존감 때문에 약간이라도 무시 받는다고 느끼시는 상황들에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것 같네요.

 

지금까지 저희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변화 원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가족분들께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다른 질환의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일반적인 치매보다 이른 나이에 발병하고, 기억력의 저하보다 성격 변화가 두드러지는 전두측두엽 치매라는 질환의 경우 H씨 아버지에게서 보이는 변화들을 유발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성격과 행동의 변화가 사회 생활을 정리하는 은퇴 시기에 맞춰 나타난 점을 고려한다면 심리적 문제로 인해 발생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 저희가 권유드리고 싶은 한 가지 방법으로는, 아버지께서 연령별 건강검진을 통해 치매 검사를 포함한 정신과적 검진을 받으실 수 있게 된다면 더욱 확실하게 진단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겠죠.

 

가족 분들께서 아버지께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글을 맺어보려고 해요.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에릭 에릭슨이라는 분은 사람의 인생을 여러 시기들로 나누고 각 시기마다 이루어야 할 발달 과업들을 이야기했어요. 그 중 마지막 시기인 60대 이후의 노년기에는 ‘통합’이 필요한데, 이는 자기 자신의 하나뿐인 삶을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만났던 주위 사람들도 소중하게 여겨서 다른 대역을 찾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통합’에 실패하면 반대로 ‘절망감’을 경험하는데, 이 경우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됩니다. 사람들이 젊을 때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때 주로 미래에 대해 그려보는 것에 반해서, 마지막 시기인 노년기에는 관심이 과거로 옮겨가 ‘내 인생이 가치가 있었던 삶인가’라는 생각에 점차 몰두하거든요.

 

거기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결과 삶의 가치를 확신하게 되는 사람은 통합에 성공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고, 반면에 불만족스러웠던 점들에 더 몰두하게 되는 사람들은 절망하고 슬퍼지는 거죠. 이 과정에는 스스로의 주관적 평가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회경제적인 성공과 반드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H씨의 아버지께서는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여러 삶의 의미들을 찾고 계시는 중일 겁니다. ‘지난 오랜 기간 동안 아버지께서 가족들의 버팀목이 되어왔다는 것, 아버지의 자수성가로 인해 가족들이 누릴 수 있었던 것들과 그에 대한 감사, 그리고 아버지의 치열했던 인생에 대한 존경’ 등을 가족분들이 차분하게 전달하신다면, 인생의 ‘통합’을 이루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신 아버지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뇌부자들 드림.

 

 

[더 자세한 내용들을 팟캐스트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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