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손정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K 씨의 사연:

 

저는 삼십 대 후반의 여성입니다. 저는 전부터 큰 소리를 잘 견디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심장 박동이 급격하게 빨라지는 것을 자주 느껴왔습니다. 가령 저는 이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자주 윽박지르는 상사 때문에 회사를 두 번이나 이직한 적이 있는데, 제게 윽박지른 것이 아님에도 곁에서 듣고 있는 것조차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전에는 이런 증상 때문에 일상에서까지 큰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최근 점점 괴롭고 힘든 상황이 반복돼서 이렇게 사연까지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힘들어진 것은 결혼 이후부터 입니다. 제 시어머니는 쉽게 큰 소리를 치거나 윽박지르고, 화가 나면 사람들에게 욕도 하시는 성격입니다. 그런 일이 제게도 한 번 부당한 이유로 벌어진 적이 있지만, 저보다는 주로 다른 시댁 식구들에게 자주 어머니의 화가 폭발합니다. 문제는, 제가 이런 시어머니 앞에만 가면 심장박동이 견딜 수 없이 거세게 빨라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별 것 아닌 말도 자꾸만 꼬여서 하기 어렵고, 꺼내기 어렵더라도 마땅히 드려야 할 말씀은 심하게 위축돼서 전혀 하지 못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곰곰이 고민해보니, 이런 제 모습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다소 과한 체벌과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도 해보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저는 어린 아이에게는 정도가 좀 지나친 체벌을 받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웃으시며 농담처럼 그 시절 이야기를 하기도 하시고, 형제들 중 누구도 그 때 그 체벌을 상처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고 다들 평범한 어른이 되어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저도 친정 어머니와 특별히 다정한 관계는 못 되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모녀사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이나 사회생활에서 마주쳐야 했던 비슷한 상황들은 제가 늘 어떻게든 피해오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저는 60대 어르신인 시어머니의 평생 살아오신 성격을 고칠 의향도, 자격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느끼는 불편함을 해소하고 싶습니다.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상황들을 만나게 될텐데, 어떻게 하면 제가 과도한 불안과 긴장으로 그 자리를 회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정신의학신문의 답장:

 

진료실에 오시는 참 많은 분들이 고부 관계에서의 어려움을 호소하시는데, 윽박지르고 욕까지 하는 유별난 시어머니와 얼굴을 맞대야 하는 K님의 상황이 정말이지 고될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유 없이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심하게 떨려 대화마저 어려운 지금 모습은, 본인 생각처럼 분명 과도한 수준의 불안으로 보여집니다. 말씀대로 이전까지는 이런 불안을 느낄 상황을 되도록 피하면서 지내왔지만, 그렇게 회피하기 힘든 직장과 결혼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되신 게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불안 수준이 높은 상태에서는 주변의 사소한 자극에도 깜짝 놀라는 예민한 반응을 하게 되는데, 이를 과각성이라고 합니다. 사실 각성이란건 주위의 위협을 빨리 감지해서 알맞은 대처를 하게 하는, 생존에 필요한 우리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위험 상황이 아님에도, 가령 사소한 소음에도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면서 K님이 말씀하신 심한 두근거림이나 온 몸의 긴장, 불안감을 겪는 상태를 과각성이라 하고, 치료가 필요한 불안 장애에서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시어머니, 직장 상사처럼 나보다 연배가 높고 권위가 있는 대상들에게 두려움과 불안, 긴장을 느낀다고 하신 점에 대해 좀 더 생각보겠습니다. 말씀대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체벌을 받으면서 극도의 위협감과 공포를 반복적으로 느꼈다면, 어른이 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나 대상을 접할 때 원치 않게 당시의 부정적 감정 경험이 유발되기가 쉽습니다.

 

사진_픽셀

이는 과거 중요한 인물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이 지금 주변사람과의 관계에서 재현되는, 일종의 ‘전이’경험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금의 불안, 긴장과 두려움은 어린 시절 성장 과정에서의 반복된 트라우마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러한 트라우마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심해서 일상 생활과 대인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이 매우 큰 상태라면 '복합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complex PTSD)', 혹은  ‘발달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Developmental PTSD)’라는 진단을 고려하기도 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줄여서 PTSD)은 본래 생명을 위협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심각한 사건을 겪은 생존자들이 겪는 재경험, 회피, 과각성과 같은 증상에 관련된 진단입니다. 그러나 학대나 방임처럼 어린 시절 오랜 기간 신체적 혹은 정신적 외상(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이 아닐지라도)을 반복적으로 받은 경우에, 성인기 이후까지 기분, 감정, 성격에 관련한 증상을 유발할 수가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계속되면서 위와 같은 넓은 개념의 진단이 제시되었습니다. 스트레스에 대한 타고난 감수성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형제분들은 괜찮다고 해도 K님께는 어린 시절의 체벌이 반복적인 트라우마로 새겨져 지금의 불안과 긴장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 겁니다. 자동차 사고를 겪은 PTSD 환자들이 그 뒤로는 그 차 뿐 아니라 다른 자동차들도 못 타게 되는 것처럼, 지금의 K님도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이미지나 혼나던 기억이 조금이라도 연상되는 상황이 되면 증상이 유발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물론 지금의 K님께서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 오직 어린 시절의 상처 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함께 관여돼 있는지 지금으로서 자세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K님께서 일상의 다양한 상황에서 고통을 겪고 계신 점을 고려할 때,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평가와 치료를 위한 상담을 꼭 받아보시길 권유 드립니다.

 

평가 면담을 통해 필요성을 확인한 후에는 우선적으로 도움이 되는 치료로 약물 요법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불안과 과각성 증상에 즉각적 효과를 보이는 항불안제와, 세로토닌 체계의 균형을 서서히 되돌려 전반적인 불안을 낮추고 스트레스를 견디는데 도움을 주는 항우울제가 K님과 같은 증상에 주로 처방됩니다. 또 K님께서는 지금도 갈등 상황을 회피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눌러 참는 식의 스트레스 대처를 하고 계실거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의 이런 대처 방식에 대해,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과 관련된 억눌리고 해소되지 못한 감정에 대해 살펴보고 해소하는 면담 치료를 통해 장기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림_닥터단감(유진수 외과전문의)

또 트라우마에 관련된 증상이 현저한 경우에 고려하는 EMDR(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 우리 말로는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 이라는 치료법이 있습니다. 쉽게 설명 드리자면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하나의 기억에 집중한채 치료자의 지시에 따라 안구 운동을 반복하는 치료입니다. 안구 운동이 뇌의 기억처리 과정과 관련이 있어서, 치료를 지속하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은 무뎌지고 그 기억을 이전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료를 꾸준히 받는 과정에서 남편 분께서도 주치의를 통해 K님의 현재 상태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당장의 버거운 문제인 시어머니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조금 더 중재적인 역할을 맡아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내 뜻과 관계 없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지금도 내 마음에 멍에를 씌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사실 속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혼자서 깊은 고민도 하고, 이렇게 저희에게도 도움을 청하셨듯이 마냥 상처를 피하지 않고 이겨내기 위해 애쓰시는 K님의 사연을 읽으면서, 지금껏 겪어온 고통에서 오래지 않아 회복하시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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