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누가광명의원 조석현 원장]

 

좌 -전체주의의 기원(저자 한나 아렌트 |역자 이진우, 박미애| 한길사), 우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인생책에 또 한 권이 추가됐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이 책을 읽기 직전까지 인생책은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길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 독일 카셀 대학의 김덕영 교수의 번역과 해제가 있어야 제대로 된 막스베버의 번역본이라 할 수 있겠다.

 

막스 베버의 책을 인생책으로 꼽는 이유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의 사회로의 선순환을 일으키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를 정착시켰다는 사회학적 현상을 베버가 밝혔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흐르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고독을 베버가 꿰뚫었기 때문이다. 베버의 통찰은 이런 것이다. 가톨릭이란 안전한 구원의 하이어라키에서 벗어나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가야하는 프로테스탄트들 마음 깊숙한 곳에 고독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이 고독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직업을 소명으로 알고 마치 금욕적 수행을 하는 수도사처럼 일하게 했으며, 그때 생긴 자본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단지 사회학적 현상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그 동력을 밝혀낸 것은 인간을 누구보다 깊이 성찰한 까닭일 것이고, 빙산의 거대한 밑동을 본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800여페이지가 넘는 아렌트의 책을 읽으며 베버의 때와 같은 전율을 느꼈다. 프랑스 혁명 이후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똬리를 튼 전체주의를 단지 역사적 서술만으로 일괄했다면 하나의 역사서로 치부했을 텐데, 감히 이 책이 정치 철학서로 불리는 까닭은 전체주의가 형성되는 과정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기저 메카니즘을 인간의 내면을 쏙아내서 밝혔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전 세계를 통치하려고 했던 이데올로기가 먹였던 이유는 “원자화된 개인의 고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국가라는 것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시민이라는 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왕과 귀족과 농노가 일체가 되었던 봉건주의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불일치가 생겨났고, 계급간의 갈등이 커져갔다. 그 갈등을 해결하기에 초기 국가의 형태와 능력이란 미천하기 그지없었다. 오랜 세월 자기 나라 땅하나 없는 유대인들이 유럽 곳곳에 퍼져 살고 있었고, 물건을 만들고 사고파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유대인들에게는 더러운 돈만 만지는 것이 허락되었다. 얼기설기 얽혀있는 유럽 땅을 마치 땅따먹기 하듯 영토랍시고 금을 그어 만든 초기 국가에서 유대인들은, 아니 금융업에 눈이 밝은 어떤 유대인들은 자기 살 길을 진즉 깨달았다. 자신들의 뒤를 봐줄 귀족계급들에게 돈을 대는 것이었다. 시민계급들에게 반유대주의가 번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체주의가 범민족주의운동을 들먹이며 반유대주의를 표방한 것은 시민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시류를 읽었기 때문이다.

 

사진_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1789

1차 세계대전 후 찾아온 혹독한 경제침체와 한 국가 안에 다양한 민족들이 살면서 불어닥친 민족 간의 갈등, 무능한 국가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 좌절된 계급 상승의 꿈, 그 속에서 시민들은 철저히 개인, 개인으로 고립되었다. 원자화된 개인의 고립은 대중이 폭민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고립된 개인들을 전체주의 지도자들은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논리로, 게르만 민족이, 슬라브 민족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폭민으로 만들었다. 전체주의자들이 사용한 툴은 범민족주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국가와 대립되는 것이고, 국가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나치당을 검색하면 Nationalsozialistich Deutsche Arbeiterparei 라고 나온다. 이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라고 번역한 것은 무지한 것이다. 독일어 National은 국가라는 뜻도 있지만 민족이란 뜻도 있다. 전체주의가 일어난 배경에 무능한 국가에 대한 분노와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범민족주의 운동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치당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고립된 개인이 폭민이 되는데 전체주의 지도자들의 역할만이 있었을까? 아렌트의 통찰은 800페이지가 거의 다 끝나는 시점에서 드러난다. 이 구절을 읽기 위해 몇 달간 끙끙댄 건지도 모른다.

 

"외로움이 고독으로, 논리가 사유로 전환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833p, 1,2권 누적페이지)

 

고립화된 개인은 외로움에 처한다. 외로움 속에서 개인들은 외로움을 벗어나게 해줄 논리를 갈망한다. 뭔가 딱 들어맞는 설명을 원하고 이 외로움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똑 부러진 해결책을 원하다. 그러나 인간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는 길이다. 고독 속에 거하면 논리가 사유로 전환된다. 사유에는 답이 없을 수도 있다. 똑부러진 해결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유는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게 해 주고, 폭민으로 전락하는 걸 막아준다. 참으로 고독 속에서 인간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나 싶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질병으로, 혹은 개인적 성향 탓으로 외로움을 겪는 이들에게 뭔가 이치에 딱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해 줄때 더 이상 생각하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저 논리의 수준에서 넘어가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들이 고독 속에 거하며 구원의 길을 찾아갔듯이 인간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영영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는 사유의 길로 나아가야 하겠다. 그래야 전락하지 않을 테니까. 아렌트의 책이 인생책이 된 이유는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다른 인생책을 만나러 간다. 자, 이제 조르조 아감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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