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뇌부자들 [9화 Part 2-2]

 

J씨의 사연:

 

안녕하세요, 요즘 연애 고민으로 밤잠이 사라진 시간을 뇌부자들로 위로 받고 있는 30대 초반의 여성 청취자입니다. 몇 살 위의 남자친구와 연애 6개월 차에 접어들었는데요, 저희는 보름에 한번 정도는 밤을 새며 굉장히 심하게 다툽니다.

 

남자친구는 사소한 문제로 다투던 중에 제 행동이나 말 한 가지에 대해 물고 늘어지며 "너는 나를 버리려고 한다, 헤어지자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제 그만하자”는 저의 말을 들으면, 남자친구는 이것을 '버림, 부정, 이별' 등의 의미로 해석해 극도로 절망하고 폭발해 버립니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거나, 어린아이가 마트에 앉아 떼를 쓰는 것처럼 한 시간이 넘게 엉엉 운다거나, 혹은 엄청나게 소리를 지릅니다.

 

“오빠가 오해하는 거지 그런 게 아니다”라는 저의 말에도 자신의 상처받은 감정을 보듬어주지는 않고 자기 탓을 한다며 더 큰 화를 냅니다. 이러다 보면 어느새 다툼의 시초가 되었던 문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피해자인 남자친구와 가해자인 저만 남습니다. 결국 제가 거의 자포자기인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해야만 싸움이 끝이 납니다.

 

남자친구의 또 다른 문제는 약점이나 잘못을 지적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사소한 말에도 "또 내 탓이지!!", "내가 내 탓하지 말라고 했지!" 라며 격하게 반응한다는 것 입니다. 본인의 잘못이 없는 일에는 눈부시게 쿨하지만, 본인이 잘못한 정도가 심할 때일수록 오히려 저를 비난하거나 화를 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남자친구가 나쁜 사람 같지만, 보통 때는 다정하고 책임감 강한 좋은 사람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제가 ‘왜 저렇게까지 스스로를 내모는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생각에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남들에게 뒤떨어져 보이는 게 싫다”라며 안 그래도 바쁜 회사 퇴근 후에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어머니와 동생을 자신이 안고 가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해요. 그 와중에 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데도 소홀하지 않고요. 평생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살아오면서 술, 담배도 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가진 사람인데, 타인에 대해서도 높은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는 동시에 거는 기대는 낮아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고, 대학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들과도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한다네요.

 

제 예민하고 갈등을 회피하는 성향 때문에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키워 온 것 같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남자친구가 애정결핍이 아닌가 싶은데요, 선생님들이 보시기에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또 저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저희 커플은 어떻게 해야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지 상담 부탁 드립니다.

 

사진_픽셀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입니다.

보통 때는 다정하고 책임감이 강하지만 다툴 땐 모든 이야기를 이별과 버림으로 해석하고 이 때문에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남자친구에 대한 사연을 보내주셨네요. 굉장히 힘드실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J씨께서 남자친구분을 많이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경계성 인격 성향입니다. 이러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자기 이미지가 단단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주변, 특히 가까운 사람들의 평가와 반응에 예민하지요. 상대방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나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나를 버리고 떠날게 틀림없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본인에게 굉장히 강렬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 비이성적인 행동을 유발하는데요, 남자친구분처럼 울고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가장 흔하지만 심하게는 자해를 하거나 자살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의 표출인 동시에 그 이면에는 상대방을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유기불안이라고 부르는 이 ‘버림받을 것 이라는 두려움’을 유발하는 상황이 너무나 다양해서 쉽게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상대는 별 뜻 없이 한 말인데도 경계성 인격 성향을 지닌 분들은 그 속에서 이별의 제스처를 찾아내곤 하지요. J씨께서 다툼 중에 이야기한 그만하자는 말 역시 남자친구분에겐 ‘당장 헤어지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졌던 것 같습니다. 사랑을 주어도 쉽게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을 떠날 거라고 의심하는 모습을 보면 J씨가 말씀하신 애정결핍이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경계성 인격성향의 특성에 잘 들어맞지 않나 싶네요.

 

남자친구의 또 다른 문제로 꼽아 주신, 약점과 잘못에 대해 지적받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모습은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개인의 이상과 가치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담고 있는 심리구조인 초자아(superego)가 비대해졌을 가능성입니다. 한 사람의 심리는 원초적인 욕구로 차 있는 이드(id), 현실과 욕구 충족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자아(ego), 그리고 초자아로 구성되어 있고, 세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중 초자아가 비대해지면 ‘나는 항상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라는 강박적인 생각이 행동을 지배하게 되고, 이러한 지시를 어기면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되지요. 어머니와 동생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과 타인에게 높은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려는 것도 이의 영향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타인에게 잘못을 지적 받게 되면 과대해진 초자아의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이 더해지면서 일반적인 수준보다 강한 분노가 표출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나는 완벽한 사람이다’ 라는 미성숙한 자기애가 내면에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 입니다. 성장과정 중 형성된 낮은 자존감에 대한 방어로 스스로를 ‘학업적으로,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으로 여김으로써 우월감을 획득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 스스로를 부합시키기 위해 자신을 혹사해 가며 일과 공부, 연애,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해내려고 하는 거지요. 타인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취할거라는 믿음이 없다는 점 역시 자신을 타인에 비해 도덕적으로 뛰어난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자기애적 성향은 분명 여러 방면에서 자기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온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성향 탓에, 잘못이나 단점을 지적당하고 본인도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 되면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설정한 ‘완벽한 나’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기 때문에 지적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감정적 반응이 생겨나는 겁니다. 본인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쿨한 반면에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되려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남자친구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셨는지 궁금합니다. 갈등을 피하는 편이라고 하셨으니 어쩌면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를 하고 계시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두분 다 차분한 상태에서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남자친구가 비난 당하는 느낌을 받지 않게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문제’ 라는 뉘앙스를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이를 테면 ‘오빠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데-’ 라는 표현 보다는 ‘우리 다툼이 이런 이런 식으로 진행 되는 게 문제다’ 라는 표현이 더 좋겠지요. “싸움을 할 때 대답을 안 하는 건 나의 회피 성향 때문인 것 같다” 라는 식으로 J씨가 생각하는 본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먼저 인정하고 오픈 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긍정적인 건, 연애기간을 거치면서 남자친구분에게 어느 정도는 J씨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는 점 입니다. 남자친구는 보통은 마음속에 내재된 상대가 나를 떠날 거라는 불안 때문에 누군가와 관계 맺는 거 자체를 꺼려왔던 것 같은데, J씨는 그 벽을 뚫고 남자친구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으로 자리를 잡은 거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인격 성향이라는 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단기간에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으로도 남자친구에게 ‘너를 떠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주면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는 나아지겠지만, 그러려면 J씨께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말과 행동을 전부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추다 보면 당연히 지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J씨 스스로 나름의 선을 정해 놓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친구가 어느 정도 수준의 반응을 보이는 것 까지는 참겠다, 혹은 한번에 문제 해결이 안될 경우에 몇 번까지는 이야기를 해 보겠다 라는 식으로요. 사랑한다면 상대를 이해하고 견디는 게 필요하죠. 하지만 사랑의 크기가 크다고 내가 무조건 더 많은 걸 감수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자신을 괴롭게 만들면서까지 사랑을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일 소중한 건 J씨 자신이니까요.

 

남자친구 분께도 한 말씀 드리자면, 완벽한 나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것, 성취해야만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보니 정작 눈 앞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소홀해지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정작 그 사람이 힘들다는 표현을 하면 떠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그 사람을 보듬어 주는 대신 본인의 감정에만 집중하고 계시는데, 한번쯤 스스로가 상대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생각해 보는 게 필요합니다. 두 분 사이에 장애물이 되고 있는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완벽함에 대한 집착 모두 면담치료에서 다룰 수 있고, 꾸준히 치료를 받는다면 좋아질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도 고려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뇌부자들 드림

 

해당사연 링크 :

1부: http://www.podbbang.com/ch/13552?e=22303219

2부: http://www.podbbang.com/ch/13552?e=2230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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