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기르는 일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손이 많이 간다. 오래 생각해야 하고 자주 고민해야 한다. 움직이지도 않는, 풀 따위에 지나친 것 아니냐는 비웃음도 보았다. 그러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무엇에든 진심이 닿을 정도가 되려면 꽤나 정성을 쏟아야 한다. 내가 식물을 기르고 함께 지내면서, ‘어디에 두면 더 좋을 것 같다’, ‘요즘 점점 시드는데 이유가 뭘까’ 라고 평상시에도 꾸준히 생각하며 지내는 것은 내 마음을 다해 지켜내고 싶은 생명에 대한 태도인 셈이다.

 

요즘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취미가 있고, 그것에 대한 열정으로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을 본다. 우리는 노동을 해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동시에 합리적이지 않은 어떤 사랑으로 힘을 얻는다. 그것이 나에게는 식물과 함께 하는 삶이다. 식물을 알아채는데 수 년이 걸렸다. 지금도 자신있다고 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취미 이상의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그렇게 며칠을 또 몇 달을 계속 해서 작은 잎과 큰 가지에 대해 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궁리하고 있다.

 

함께 하는 사이 훌쩍 자라버린 소철을 보며 잠깐 씩 감상에 젖는다든가, 훌쩍 자라버려 화분 밖으로 뿌리가 넘실거리는 것을 가만 두고 버티면서 염려하는 일은 이제 일상이다. 심지어는 집에 들어서면 어제 물을 줬어야 했던 것이 떠오르며 귀찮고 동시에 부담스럽기도 하다. 결국에는 사부작 거리며 물이 필요한 잎과 뿌리에 정성을 다 한다. 삽시간에 아침이 낮이 되어있고, 낮은 밤이 되버린다.

 

어디에 두어도 꽤나 이 집에 적응을 한 녀석들은 어쩌면 내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동시에 마음을 다 하지만 생각처럼 수형(모양새)이 안 잡히거나, 노란 잎을 하나 둘 떨구는 것들을 지켜보면 마음이 초조하고 조금은 포기하고 싶어 진다. 식물을 처음 키울 때는 이렇게 기세가 흐려지며 죽어버리는 것들을 보고 꽤나 마음이 상했다. ‘나는 이 식물은 키울 수 없는 사람인가?’ ‘왜 또 죽이게 된거지?’ 수년 전에는 콩란이 그랬고, 요즘은 흔하게들 키운다는 스킨답서스류가 그렇다. 잘 알고, 잘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검게 말라 죽어버린다. 그럴 때 마다 속이 타고 답답했다.

 

요즘은 조금 자신감이 생긴 것인지, 더 뻔뻔해진 것인지…, 구하기 힘든 식물이 아니라면 죽자마자 화분을 비워내고 새로 들인다. 평균적으로 키우는 식물의 수 보다 그 수가 많다보니 죽는 식물은 꾸준히 생긴다. 어떤 때는 죽을 줄 미리 알고 있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갑자기 죽어버린다. 식물은 꽤나 잘 죽고, 그 중 얼마는 새로 잎을 내며 살아낸다. 나는 그 가운데서 오케스트라 지휘자 처럼, 온도를 맞추고 습도를 맞추고 바람을 쏘인다.

 

요새는 식물이 죽으면, 또 들인다. 다시 한 번 더 죽으면, 또 다시 들인다. 그렇게 우직하게 살려내는 식물이 있고, 그러다 포기하는 식물도 생긴다. 죽어버린 식물을 새로 들이는 일은 적당한 뻔뻔함과 진득한 고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마음, 그 단단한 마음이 필요하다. 내게 용기와 고집과 뻔뻔함이 생기기까지, 숱한 일들이 있었고, 하루에도 수 백 번씩 흔들리는 내 마음이 있었다. 방금 죽은 식물을 새로 들인다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 기회를 다시 주는 일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나에게 그다지 너그럽지 않아서 새 식물을 들이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계속 해서 비슷비슷한 약을 먹고 비슷하게 살아온 듯 하지만, 나의 내면은 시간이 흐르며 꽤나 흔들렸고, 그 중에서 얼마쯤은 단단해 졌다. 이 것으로도 충분히 변했다고 인정하고 싶다. 결국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삶을 흐르게 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비판하고 껴안고 밀어내는 모든 과정에 단호함과 우유부단함이 공존한다. 식물을 새로 들여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나는 나의 모호함과 예민함과 부주의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한다. 공들이는 식물이 더 잘 죽어버리고, 가만 두고 물만 종종 주던 식물이 더 튼튼하다는 것은, 내 마음 가는 대로 되어주지 않을 존재들 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한다.

 

그저 나의 취미가, 그것을 넘어서는 관심과 사랑이 식물을 향한 것이라는 데 큰 의미를 둔다. 그들이 살아가는 과정과 내가 기세가 꺾인 식물을 끝까지 돌보는 것이, 어쩌면 부족한 나를 내가 품어주는 것으로 치환되는 과정이라고, 용기가 더 늘었다고 여기는 것 이다. 그것에 큰 의미가 있다. 어제 까맣게 죽어 사라진다 해도, 나는 다시 또 새로 구해올 것이다. 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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