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입니다. 최근에 급격한 감정변화를 겪었습니다. 너무나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것들 투성이라, 매번 이럴 때마다 너무 괴로워서 종일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관찰하며 정리를 해봤습니다. 저는 지금은 이런 감정변화가 ‘너무 극단적이다’라고 자각하고 있지만 이내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겪고 있는 증상은 대략 이렇습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발작적인 우울과 자학, 무력감이 나타납니다. 순식간에 처박히는 듯한 감각이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까지 이어지고 작은 스트레스나 자극으로도 이런 기분에 빠집니다. 그럴 때면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집니다. 반대로 갑자기 기분이 너무 올라가기도 합니다. 자신감이 높아지고 뭐든 할 수 있을 듯한 감각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비현실적인 계획을 짜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현실감각이 무뎌집니다. 이런 상반된 기분 변화 양상이 나타나면서 자존감이 널뛰고 상습적으로 자살과 자해 충동이 듭니다.
누군가 언성을 높이거나 큰 소리가 나면 공황발작처럼 갑자기 눈물이 나오면서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면 머리가 굳어버리고 사고회로가 망가지는 듯한 우울감과 자학이 몰려옵니다. 무서움도 동반되고요.
극단적일 정도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아마 낮은 자존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소심하고 전형적인 회피형 성격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인관계가 어렵고 작은 비난이나 상대방의 비판으로 과도하게 위축됩니다. 친구들에 대한 의존이나 집착이 심한 편입니다. 무난한 대인관계를 가진 이들에 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과도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만성적 외로움과 공허감이 있습니다. 마음이 추워서인지 신체적으로도 강렬한 추위를 느낍니다. 이걸 이인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편입니다.
과거 상담을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상담자와의 친밀감, 라포가 형성되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상담사분에게마저 제가 겪는 어려움을 감추는 게 많았고 그래서인지 상담에 진전이 없었습니다. 말씀드린 면들이 늘 기저에 깔려있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감정변화처럼 발작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만성적인 면과 발작적인 면, 모든 것이 너무 힘듭니다. 저는 왜 이런 걸까요? 고3인지라 공부해야 하는데 이런 문제로 발목을 자주 잡혀 조금이나마 해결해 보고 싶습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먼저, 이렇게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고 세심하게 표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연을 통해 사연자님이 겪고 계신 고통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진지한 태도도 함께 담겨 있어 인상 깊었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관찰하고 그것을 정리해 보려는 시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지금의 어려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에, 이미 스스로 회복과 변화의 중요한 첫 단계를 밟고 계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연에서 말씀하신 감정의 변화 양상은 매우 뚜렷하고 강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만큼의 깊은 우울감과 무기력, 자학적인 사고가 나타나며, 이로 인해 일상 기능이 저하되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이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어떤 시기에는 감정이 갑자기 고양되고 자신감이 넘치며 비현실적인 계획을 세우는 등 현실감이 희미해지는 경험도 반복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양극단의 감정변화는 기분의 단순한 기복이라고 보기보다는, 보다 심도 있는 평가가 필요한 기분장애 스펙트럼의 가능성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감정 변화가 비교적 명확한 시기 구분과 함께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그 시기에 따라 일상의 감정과 행동, 사고방식이 뚜렷하게 달라진다면, 양극성 장애(조울증)의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장애에서는 고조된 기분 상태, 과도한 자신감과 비현실적인 상상이나 계획, 충동적 행동을 동반하는 조증(또는 그보다 가벼운 형태인 경조증)이 나타나고, 그 이후 깊은 우울로 전환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연의 내용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으며,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면담과 평가를 통해 보다 정확하게 진단을 내려야 하는 부분입니다.
이와 더불어, 감정이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듯한 경험, 작은 자극에도 극심하게 위축되고 불안해지는 반응, 대인관계에서의 민감성과 집착, 반복되는 공허감과 자기 파괴적 충동 등은 경계선 성격 특성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특히 애착의 불안정, 자아 정체감의 혼란, 정서 조절의 어려움으로 연결되며, 관계 안에서의 거절과 비판에 과도하게 반응하게 만듭니다. 감정이 쉽게 요동치고, 순간적인 자해 충동이나 관계에 대한 집착이 나타나는 이유 역시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격적 특성은 발달 과정과 환경적 요인, 정서적 경험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되기 때문에 성급하게 특정 성격장애로 단정 지을 수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전문가의 정밀한 평가가 필수적입니다.
더불어, 신체적으로 강렬한 추위를 느끼는 현상이나, 자신을 바깥에서 바라보듯이 느끼는 경험, 내면에서 스스로와 대화하며 위로를 시도하는 모습은 이인증이나 비현실감 증상일 가능성도 엿보입니다. 이는 심한 스트레스나 불안, 우울 상태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 정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심리적 방어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이러한 반응은 자신을 일시적으로 보호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빈도가 높아지고 일상생활을 방해한다면 역시 치료적 개입이 필요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이전 상담 경험에서 상담자와의 신뢰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게 생각해 볼 부분인데요. 심리치료의 효과는 치료자와의 관계, 즉 ‘치유적 동맹’이 얼마나 형성되느냐에 크게 좌우됩니다.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감정이나 문제를 감추게 되는 경우, 상담은 표면적인 수준에 머무르게 되어 진전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는 사연자님이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사연자님께 맞는 방식과 사람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뢰할 수 있고, 감정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담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 다음 단계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감정의 기복이 크고, 자존감이 자주 무너지고, 외로움과 공허감이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이라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혼자 해결하려 애쓰지 않고 전문가와 함께 그 흐름을 이해하고 다뤄보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감정의 패턴을 일기나 메모로 기록하면서 감정과 생각, 상황 사이의 연결 구조를 파악해 보는 것도 매우 유익한 방법입니다. 이러한 자기관찰은 감정을 통제하는 힘을 기르는 데에 도움이 되며, 치료자와 함께 나누는 대화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결국 지금 경험하고 있는 많은 어려움은, 단지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심리적인 구조와 정서적인 반응 체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는 회복이 불가능하거나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충분히 치료와 조정을 통해 변화가 가능한 과정이라는 점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단지 그 시작점이 혼자서 하기에는 벅찰 수 있으므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적절한 진단과 개입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연에 담긴 경험들은 여러 정신건강 문제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사연에 담긴 내용들만으로 단정적으로 어떤 특정 장애라고 판단하거나 진단을 내리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정신과 진단은 반드시 전문가와의 면담, 평가, 필요한 경우 심리검사를 통해 이뤄져야 하며, 그래야만 적절하고 안전한 치료 방향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기를 혼자 버티는 것보다, 전문가와 함께 조금씩 나눠보면서 함께 가는 과정으로 만들어가시면 좋겠습니다. 사연자님의 감정은 무조건 ‘비정상적인 것’으로만 치부될 것이 아니며, 사연자님이 느끼는 혼란 역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변화와 회복이 가능한 영역입니다. 지금처럼 자신을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앞으로의 회복 과정에 큰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꼭 필요한 도움을 받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장승용 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한국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Master class 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