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 주변에는 유난히 섬세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극에 쉽게 압도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밝은 조명이나 시끄러운 소리, 낯선 환경에서도 쉽게 피로감을 느끼고, 누군가의 기분 변화나 분위기의 미세한 흐름에도 금세 감정이 흔들리곤 하지요. 이런 분들을 ‘초민감자(HSP:Highly Sensitive Person)’, 즉 ‘매우 민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HSP는 임상적으로 정의 내려진 진단명은 아닙니다. HSP는 미국의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Elaine Aron)이 제안한 성격 특성 개념으로, 전체 인구의 약 15~20%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고됩니다. 다시 말해, 드문 성향이 아니며, HSP를 특정한 문제로 보기보다 하나의 신경 생리적 특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HSP의 성향은 단순히 ‘예민하다’라는 말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론 박사는 HSP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네 가지 특징을 정리한 바 있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깊은 처리 :
HSP는 정보를 깊이 있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같은 상황을 겪어도 더 오랫동안 고민하고, 더 많은 맥락과 의미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결정 하나를 내리기까지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극도로 꺼립니다.
2. 과자극 경험 :
외부 환경 자극에 쉽게 피로하거나 압도됩니다. 시끄러운 공간, 붐비는 거리, 강한 냄새, 스케줄이 꽉 찬 날 등은 이들에게는 마치 경보가 계속 울리는 것처럼 스트레스 요인이 됩니다.
3. 감정 반응의 강도와 공감력 :
HSP인 분들은 다른 사람의 기분, 말투, 표정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감정적으로 깊이 공감하며, 감정이입이 과도할 경우 자기 감정조절이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4. 감각적 민감성 :
조명 색깔의 미묘한 차이, 냄새, 온도 변화와 같은 주변의 사소한 변화도 예민하게 감지합니다. 동시에 음악, 예술, 자연 풍경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문제는 HSP라는 특성 자체가 아니라, 자극이 많은 현대 사회 환경입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 학교나 회사에서 계속되는 경쟁, 많은 인간관계, 잦은 변화와 예측 불가능성이 높은 사회적 요구는 HSP에게 만성적인 과부하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직장이나 학교, 가족 내에서 반복적으로 "너무 예민해", "그 정도는 그냥 넘겨야지"라는 반응을 듣다 보면 자신을 문제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거나, 감각을 억누르려 하면서 더 많은 심리적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HSP 분들이 자신의 민감함을 억누르지 않고도 일상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과자극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휴식 루틴' 만들기
매일 짧은 시간이라도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해 보세요. 명상, 산책, 조용한 곳에서의 독서, 조명과 소리를 조절한 휴식이 감각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HSP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회복’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감각 자극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기
나에게 불편함을 유발하는 자극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보세요. 이어플러그나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 선글라스, 조도 조절 가능한 조명 등을 활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3. 일정을 조절하는 기술 익히기
하루 일정을 너무 빽빽하게 잡지 않고, 중간중간 '여유 시간'을 확보해 두세요. 이 잠깐의 여유 시간을 여러 자극을 경험하며 느낀 피로감으로부터 회복하는 데 활용할 수 있습니다. 약속이나 업무 일정 사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10분, 15분이 큰 차이를 만듭니다.
4. 자신의 민감성을 긍정적인 자산으로 바라보기
HSP는 예술적 감수성, 인간관계에서의 공감 능력, 섬세한 관찰력 등에서 탁월한 장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민감함을 어떻게 다루는가이지, 민감성 자체가 결코 ‘결함’은 아닙니다.
5. 가까운 사람에게 HSP 성향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
HSP는 의도하지 않은 오해를 받곤 합니다. 너무 까탈스럽거나 유별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스스로도 ‘내가 왜 이럴까’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기도 하고, 자존감도 낮아지고 무력감을 느끼기 쉽지요. 이런 악순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성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뢰하고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향을 설명해 두면 오해를 줄이고 관계도 한결 부드러워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끄러운 장소를 꺼린다는 점, 질문을 받았을 때 여러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로 대답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 센 조명이나 향기는 불편하다는 점 등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죠.
HSP는 질병이 아니며, 치료받아야 할 결함도 아닙니다. 다만, 이 성향이 강점이 될 수 있기 위해선 자기 이해, 자기 수용과 함께 자기 보호 기술이 꼭 필요합니다. 감각의 레이더가 남들보다 조금 더 섬세하다는 건, 더 많은 아름다움과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을 더 많이 가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자신이 HSP에 가깝다고 느껴진다면, 스스로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필요한 만큼 자신을 위한 안전지대를 만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조금은 시끄럽게 느껴지더라도 그 안에서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 그것이 HSP의 삶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우경수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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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것만으로 왠지 위로가 됐어요. 뭐라도 말씀드리고 싶어서 댓글로 남겨요. "
"게을렀던 과거보다는 앞으로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네요. "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