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20대 직장인 여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요즘 우울증을 심하게 겪고 있어서 사연을 남깁니다. 남자친구와 만난 지는 1년 정도 되었고, 처음 만났을 때도 우울하고 다운되어 보이는 모습이 있기는 했지만 증상이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남자친구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서 우울증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늘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자신이 가치 없는 사람이다, 삶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해요. 

저도 제 일상이 있고 일도 해야 하니 항상 같이 있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친구를 챙기지 않을 수 없으니 거의 주말마다 만납니다. 저도 가족들과 시간도 보내고 챙겨야 하는데 남자친구를 챙기느라 가족에게 소홀하게 되어 부모님과 부딪치는 일도 생기고 있어요. 남자친구 잘못은 아니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제 삶의 균형이 깨지는 기분이예요.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니 어떻게든 그 사람 옆에 있어 주려고 해요. 

그런데 아무리 위로해주고 긍정적인 말을 해줘도 위로가 안 되나 봐요. 제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아무 의욕도 없어 보이더라구요, 조심스럽게 병원 치료나 심리상담 치료를 권유해도 “소용없다, 의사들 하는 소리 전부 똑같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본인도 안 좋은 생각을 안 하고 싶어도 하게 되고,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찾아보려고 해도 뭘 해도 재미가 없다, 의사들이 하라는 대로 해도 안되는 걸 어떻게 하냐고만 합니다. 

그래서 밥이라도 잘 먹이고 싶어서 맛있는 식당에 데려가려고 노력도 해보고 기분 전환 시켜주고 싶어서 좋은 걸 보여주려고 나가자고 해도 안 나갑니다. 억지로 데리고 나갈 때도 효과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최근에는 이야기라도 들어 주자 싶어서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데 너는 내가 힘든 이야기를 하면 듣기만 한다고 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다. 미안하다."라는 말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저도 점점 지치고 공감도 안 되니 섣불리 공감은 못하겠습니다. 저도 방법을 찾고 싶은데 막막하고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어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다가도 남자친구가 제가 힘든 본인을 버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면서 겨우 이 정도로 헤어지는 건 아니지 싶다가도 원래 저의 삶을 되찾고 싶기도 하고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남자친구가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제 행복도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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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을 읽으며 우울증으로 힘들어하시는 남자친구분을 염려하고 남자친구분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연자님의 마음이 잘 느껴졌습니다. 또, 남자친구분의 옆에서 힘이 되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셨을 사연자님이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남자친구분을 위한 사연자님의 진실한 마음과 그간의 노력에 응원과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남자친구분이 우울증을 경험하신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그 증상이 어느 정도인지 사연을 통해 모두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교제 초반에도 우울한 모습을 보이셨다고 한 점을 미루어볼 때 우울감이 상당히 오래 지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울증을 비롯한 심리적 어려움을 경험하는 분들의 연인, 가족, 친구, 지인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상당한 부담과 어려움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막연해서 답답함과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연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섣불리 조언이나 공감을 하기도 어려워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과 행동에 상대방은 오히려 상처받았다고 하거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도움을 주고 싶었던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서운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막막하기도 합니다. 힘들어하는 사람의 옆을 지켜주기 위해 내 일상의 많은 시간과 물리적, 정신적, 때로는 경제적 부분까지 할애하느라 삶의 균형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사연자님 역시 남자친구분의 곁을 지키고 돌보시느라 본인의 일상이 깨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계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부모님과 갈등을 경험하고 계시기도 하고요. 사연자님 역시 본인의 삶이 있는데, 남자친구를 위해 많은 부분을 희생하면서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도 드실 것 같습니다. 

사연에 남겨주신 내용으로 보았을 때 사연자님은 그동안 남자친구분을 잘 지지해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연인이나 가족, 친구에게 “힘내!”라고 하거나 판단, 충고를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면서 ‘나는 당신편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상대방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연자님은 남자친구분의 상황이나 이야기를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해 오신 것 같습니다. 또,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공감이나 반응도 자제하면서 남자친구분에게 본인의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것 같습니다. 1년의 교제 기간 동안 꾸준히 남자친구분의 곁을 지키며 한결같은 마음을 보여주셨을 사연자님께 수고하셨고, 잘해 오셨다고, 흘륭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그동안 사연자님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방법을 시도하셨고, 고민 끝에 사연을 남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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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우울증의 경우 개인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문가를 통한 적절한 진단과 함께 치료와 개입이 필요합니다. 사연자님께서 이미 정신과 치료나 심리상담 치료를 권하셨고, 남자친구분께서 치료에 대해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셨다고 남겨 주셨습니다. 비록 남자친구분이 거절하기는 했지만, 전문가를 통한 치료를 권하신 것은 매우 잘하신 일입니다. 다만, 남자친구분이 치료에 관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 치료해도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즐거운 일이나 활동을 해 보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는 무기력감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눠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예전에 남자친구분께서 우울증 치료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지, 있다면 그때 어떤 기분이나 감정을 느꼈는지, 치료과정이나 의사 혹은 상담사와의 관계는 어땠는지, 치료에 대해 염려되는 부분은 무엇인지 등을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남자친구분이 치료를 꺼리는 이유를 더 깊이 탐색해 보고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풀 수 있도록 돕고, 걱정이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이라면 어떻게 대처해 나가면 좋을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짤 수 있을 것입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과 전문가를 함께 찾아보고 예약을 돕거나 방문 시 동행하는 것도 좋습니다. 낯선 장소에서 처음 보는 전문가와 치료를 받는 과정이 도전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므로 그 과정에서 함께하면서 남자친구분이 안정감을 느끼실 수 있도록 한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남자친구분을 혼자 온전히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부담감을 조금 내려놓으시기를 권유드립니다. 남자친구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지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만약 가까운 주변 분들이 남자친구의 상태를 잘 모르고 있다면, 남자친구분과 이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나눈 후 상황을 공유할 수 있는 분들의 범위를 정하고, 필요한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사회적 관계망을 구축하는 것이 남자친구분과 사연자님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연자님이 남자친구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크더라도 남자친구분이 지고 있는 짐을 모두 나눠지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사연자님 역시 지치고 자기 삶이 없어지는 것 같은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가족 관계에서 갈등을 경험하고 있지만 일, 대인관계 같은 다른 영역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연자님 역시 남자친구로 인해 본인의 삶을 너무 많이 희생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될 수 있고, 남자친구분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남자친구분 역시 사연자님에게만 모든 정서적, 물리적 욕구를 의지하게 되면 사연자님이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서운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사연자님의 노력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결핍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연자님과 남자친구분 모두를 위해 사연자님이 할 수 있는 영역과 없는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 짓고, 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되 그 외의 영역은 남자친구분의 주변 지인이나 가족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받으며 남자친구분의 상태가 조금 더 호전되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보고 조금씩 범위를 넓혀갈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부분으로, 사연에서 힘든 남자친구를 떠나는 데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같은 감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남자친구가 힘든 상황에서 사연자님이 남자친구를 떠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며, 남자친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이 느끼시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그런 마음은 남자친구분에 대한 사랑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연인 관계가 그러하듯 남자친구분과의 관계 역시 반드시 끝까지 함께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고 연애를 하더라도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이별합니다. 남자친구분과의 관계에서 사연자님이 너무 힘들거나 지친다면 연애를 멈출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이 남자친구분에게 주는 사랑과 희생만큼, 연인 관계에서 사연자님이 사랑받고 충족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충족되지 않고 소진되기만 한다는 생각이 계속된다면 관계를 다시 정의해 볼 수도 있습니다. 남자친구분도 소중한 사람이지만 사연자님께는 자신이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관계의 지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본인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자친구분에게 줄 수 있는 도움과 지지를 제공하면서 사연자님 스스로도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한 활동이나 인맥, 관계에도 시간을 할애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충분히 에너지가 있을 때 다른 사람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수고하고 노력하신 사연자님께 응원을 보내드리며, 사연자님과 남자친구분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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