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정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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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다. 요즘 참 많이 쓰이는 말이다. 이번 생은 망했다. 어떤 직종은 망했다. 코인은 망했다. 나는 망했다. 너도 망했다. 이번 한 주 동안 이 ‘망했다’라는 말은 의사에게 붙어다니고 있다. 의대 정원을 늘리면 의사는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망하는 것의 기준을 무엇으로 보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의대 정원을 늘린다면 적어도 의사 간의 부익부 빈익빈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리고 빈에 해당되는 의사는 망했다고 불릴 수도 있다. 의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의 목표라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의료 취약지를 줄이는 것이 정책의 목표라고 한다면, 망할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 체계는 민간의료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공공의료기관의 비율은 5.5%로(공공의료 확충 필요성과 전략, 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연구원, 2020) 독일 40.7%, 프랑스 61.5%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수치다. 이 수치를 보고 가져야 할 첫 번째 의문은, ‘왜 우리나라는 공공의료기관이 적은가?’이며, 이 수치를 보고 예상해야 하는 것은 현재 기준에서 94.5%의 의료기관은 공공기관이 아니기에 ‘기본적인 수요 공급 법칙의 영향을 받겠구나.’이다. 

우리나라에서 공공의료기관이 적은 이유는 저수가 때문이다. 의료 행위로 나라가 정해 준 돈을 받아서 의료기관을 운영해야 하는데, 현재 수가로 공공의료기관을 운영하면 적자가 난다. 민간병원이라면 장례식장, 주차장, 온갖 비급여로 그 적자를 줄일 수 있지만, 이런 것들 대부분은 공공의료기관의 설립 취지와 맞지 않기에 엄두도 내지 못한다. 공공기관이 적자가 나면 감사를 받게 되고, 저수가 문제는 감사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그것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 각종 제제가 시작된다. 문제가 저수가 때문인데, 그게 아닌 다른 것들을 문제 삼기 시작하면 의료진은 94.5%의 민간 의료기관으로 떠난다. 그곳에서는 내 잘못이 아닌 문제에 대해 이런 수모를 겪지는 않아도 되니깐 말이다.

94.5%의 민간 의료기관은 기본적인 수요 공급 원칙을 따른다. 수요가 있는 곳, 즉 사람이 있는 곳에 병의원이 생겨난다. 실제로 개원을 준비하는 가장 첫 단계가, 내가 원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와 이동하는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지방에는 병의원이 생길 수 없고, 필수 의료는 지방부터 메말라 갈 수밖에 없다. 이미 사람이 적고, 출산률이 떨어지니 인구는 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식당, 카페 등 모든 사람을 상대하는 사업과 병의원이 다를 것이 없다.  

위 의문과 예상을 종합하면, 의료 취약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수요 공급 원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공의료기관이 새로 만들어져야 하지만, 설립을 하더라도 저수가로 적자가 나게 되므로, 설립을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의료 취약지 문제는 의사의 수가 아니라 저수가의 문제다. 

따라서 의료 취약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의료 취약지에 존재하는 의료기관의 수가를 올려야만 한다. 그래야 공공의료기관이 신설될 수 있다. 의사 정원을 늘리더라도, 의사가 일할 곳이 생겨야 의료행위를 할 수 있고, 그래야 의료 취약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취약지 의료기관의 수가를 올리는 것이 논의가 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2020년 보건복지위원회 현안 질의에서 신현영 의원은 의료 취약 지역에서 올바른 역할을 수행 중인 일차의료기관에 지역가산 수가를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고, 당시 보건복지부 박능후 장관은 동의했으나 이후 구체적인 논의나 변화는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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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된 공공의료기관에서 일할 의사 개인에 대한 처우 개선도 필요하다. 공공의료기관에서 일하면 책임은 늘고 제약은 많아진다. 어떤 기관에서 일하던 간에 진료로 인한 책임은 의사 개인이 지게 되는데, 공공의료기관은 진료에 제약 조건이 많아 위험 부담이 높다. 가끔 뉴스에 올라오는 몇 억을 줘도 의사가 오지 않는다는 공고를 확인해 보면, 터무니없는 근무 시간과 열악한 진료지원 시스템이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다. 주 40시간 근무하는 의사가 실수할 가능성과 주 120시간 근무하는 의사가 실수할 가능성은 분명히 다른데, 책임을 공공의료기관이 아니라 의사가 지기에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행법으로는 의료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의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책임을 나눌 수는 없다. 그래서 미래에 가치가 있는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과거 군 가산점처럼, 의사가 필수의료 영역이나 공공의료기관에서 종사했을 때, 그 기간에 따라 해당 의사가 시행한 의료 행위에 대한 수가를 가산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공공의료기관에 10년 이상 종사했을 때, 해당 의사의 진료에 대해 100% 수가를 가산해서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공의료기관에서 은퇴를 한 뒤, 개원이나 타 기관에 취직을 유리하게 할 수 있으며, 이는 의사가 공공의료기관에 재직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부차적으로 이렇게 공공의료기관을 선택하는 의사가 늘어날수록, 해당 기관에서 의사가 느끼는 진료의 제약은 줄어들 것이다. 

필수의료 영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개원이라는 주제가 나온 것이 의아할 수가 있다. 하지만 필수의료 영역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해당 과의 개원 가능성에 대해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흉부외과는 과 특성상 대형 병원에서만 종사할 수 있다. 수술에 필요한 장비와 인력을 대형 병원 정도 규모에서만 지원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내에 대형 병원은 많을 수가 없고, 흉부외과 의사가 일할 자리도 제한되어 있다. 현재는 대형 병원을 제외한 개원가에 흉부외과 일자리는 거의 없다. 흉부외과는 개원을 할 만한 질병이나 술기가 오직 하나, 하지정맥류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턴 의사가 흉부외과를 선택하는데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몇 안되는 대형 병원에 취직 자리가 없다면, 흉부외과 전문의로서의 삶이 없게 되니 말이다. 이런 직업상의 불안정 요인에, 노화로 인한 불안정 요인이 더해진다. 손이 떨리거나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 큰 수술을 할 수 없다. 의사 면허와 전문의 자격증은 평생 유지되지만, 집도의로서 수명이 짧은 것이다.

따라서 수술을 할 수 없는 시기가 오면, 필수의료 영역이 아니라 약을 처방하거나 간단한 시술을 하는 일반적인 의료 영역으로 옮겨 가야 하며, 그것이 보통 개원가 이다. 이런 맥락에서 흉부외과 의사들에게 유일한 개원 가능 질병인 하지정맥류는 중요하다. 큰 수술을 하지 못하는 나이가 됐을 때, 흉부외과 전문의로서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과에서 개원이 가능한 영역은, 의사가 필수의료를 선택하고 난 뒤 필연적으로 닥쳐올 수술이 불가능한 시점에서, 그 삶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만드는 생명줄 같은 역할을 한다. 따라서, 생명줄이 있어야 의사가 필수의료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성형외과가 그러하다. 성형외과에서는 절단된 손가락 발가락을 붙이는 영역이 필수의료 영역이다.

현미경을 보고 골든 타임 이내에 혈관과 신경을 바느질로 붙이는 정교한 수술이기에, 전문의가 이른 나이에 수술을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현재 수지접합 영역에 종사하는 성형외과 전문의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수지접합 수술을 못하게 되더라도 개원을 할 수 있고, 개원이 용이한 만큼 취직 자리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수의료에 뜻이 있는 성형외과 전문의는 용기를 내어 수지접합을 선택하기 수월하다. 

 

의료 취약지를, 지방 의료를 살리는 방법은 공공의료뿐이다. 인구가 늘어나면 민간의료도 늘어나겠지만, 인구가 줄어드는 동안에는 공공의료 기관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막연히 의사 수만 늘린다면, 그 인력이 현장에 반영되는 데 십 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뿐더러, 낙수효과가 존재할지도 불확실하다. N수, 6년의 의대, 5년의 수련을 거친 사람이 자신의 평생을 공공의료, 필수의료에 던질 수 있을까. 몇몇은 분명 큰 결정을 내릴 수 있겠지만, 그들만으로 모든 의료취약지를 개선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일부 대형 병원에 필수의료 부분을 지원해 주는 것 역시 효과가 불확실하다. 지원이 얼마나 지속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대형 병원 간판만을 믿고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필수의료를 할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평생을 무언가에 헌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10년을 헌신하는 것은 그보다는 쉬운 일이며, 그 10년을 달성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 있다면 헌신은 보다 가벼운 일로 바뀔 수 있다. 이국종 교수의 평생의 삶처럼 일할 수 있는 의사는 거의 없겠지만, 10년은 이국종 교수처럼 일할 수 있는 의사는 더 많을 것이고, 5년은 이국종 교수처럼 일할 수 있는 의사는 조금 더 많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삶 중 일부를 헌신으로 바꾸고, 그 작은 헌신들이 모여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을 개선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헌신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의사가 있는 한, 의사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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