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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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상실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이나 배우자와의 이혼, 이직이나 실직, 암이나 질병으로 인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 상실은 우리 삶의 단계에서 시시때때로 찾아옵니다. 이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상실은 종류도 다르고, 삶에 미치는 영향 역시 가벼운 것부터 매우 심각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상실이든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은 우리의 마음과 몸에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상실을 슬퍼하며 애도(grief)합니다. 하지만 이런 애도는 실제 상실을 경험하기 전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신의학적 관점에서는 이를 ‘예견된 슬픔(anticipatory grief)’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예견된 슬픔’은 정신과 의사인 에리히 린드만(Erich Lindemann)에 의해 1944년 개념화되었으며, 죽음을 비롯한 다가올 상실에 대해 예측하면서 경험하는 슬픔이나 애도, 내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는 주로 말기암 환자들과 같이 죽음을 앞둔 이들의 가족이 경험하는 애도에 관한 연구의 주제로 다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예견된 슬픔은 그 범위를 보다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까운 동료가 해외로 떠나게 되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매일 직장생활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마음을 나누던 동료가 곧 떠날 것이고,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의 동요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가 떠난 이후 직장생활이 어떨지, 이제 직장에서 힘들 때마다 누구와 이야기하며 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여기 연인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A가 있습니다. 헤어지는 이유에 따라 이별에 대한 마음가짐도 다를 수 있겠지만,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미안함과 아쉬움, 원망을 느끼는 동시에 이별 후 후련함을 느끼리라 생각하며 마음이 편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다가오는 이별과 상실을 준비하며 우리는 슬픔, 분노, 관계의 단절, 죄책감, 외로움 등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합니다. 특히 상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면 삶의 의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이후 달라질 삶의 모양,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관계의 변화 등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예견된 슬픔이 가져오는 효과와 관련하여 학계에서는 실제 상실 이후의 애도 과정(post-loss grief)에 도움이 되며 그 기간을 단축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예견된 슬픔이 상실 후 애도 과정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애도의 기간이나 양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같이 예견된 슬픔이 상실 이후의 애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이론이 존재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견된 슬픔과 상실 이후의 애도에 잘 대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단계에서 맞이하는 다양한 상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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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실과 관련된 감정이나 생각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기

예견된 슬픔을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혼란하고 복잡한 마음을 타인과 나누기보다는 내면으로 침잠하며 고립되고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감정이 보편적이지 않으며 타인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깝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때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상황과 마음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혼자가 아니며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2.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기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복잡한 마음과 생각에 이름을 붙이고 명확하게 하는 연습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일기를 쓰거나 명상, 산책 등을 통해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고 ‘지금, 여기(here & now)’에 집중하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 신체의 감각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처리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공간을 허락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3. 일상의 루틴(routine) 만들기

상실을 예상하면서 우리는 삶의 즐거움이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일상적 활동들로부터 멀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일상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실을 준비하는 중에도, 상실 이후에도 삶은 지속되며 여전히 의미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일상의 체계를 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기력과 우울이 삶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도록 사소한 습관과 행동이라도 일상의 균형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보시기를 권유합니다.

마음을 쏟아 사랑한 대상을 잃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을지라도 완벽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오히려 다가올 상실로 더 큰 불안과 슬픔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며 자연스러운 애도의 과정임을 기억하고 직면할 때, 우리는 ‘예견된 슬픔’을 통해 오히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성장한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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