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작가

 

완연한 봄 날씨를 만끽할 틈도 없이 5월도 끝나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 달이 되면 주말마다 있는 결혼식 소식으로 더 바빠집니다. 화사한 봄 날씨와 어울리는 어여쁜 5월의 신부 모습은 그 풍경만큼이나 낭만적이어서 일까요? 하지만 막 결혼식을 마친 부부가 신혼여행을 떠나는 행복한 모습을 보며, 저는 조금 다른 생각에 빠져들곤 합니다.

 

응급실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그동안 이 이야기를 꺼내도 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 응급실에서 있었던 환자들의 이야기를 모두 적어나갈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이는 이 이야기가 어떤 분께는 고통의 경험일 것이고 따라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그 분과 가족에게 고통을 상기시키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긴 하지만,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마음 한편엔 비슷한 경험을 가진 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벌써 10년 전 이야기네요. 저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마치고 인도네시아 발리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수련의였던 시기에 결혼하느라 결혼식 포함 1주일간의 휴가만을 받았기 때문에 짧은 여행을 다녀와야 했습니다. 짧기도 짧았지만 예쁜 신부와 함께 추억을 만드느라 달콤한 휴가 기간이 금세 지나가 버렸습니다.

 

제 신혼여행은 한국에서 온 커플들을 몇몇 묶어 함께 단체관광을 해주는 여행이었습니다. 드디어 발리의 공항에 도착해 세 커플이 한 팀이 되어 함께 여행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날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같은 시기에 결혼을 한 인연을 얘기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중 한 커플은 저희와 나이도 같은 데다 같은 지역 분들이라 더 반가웠습니다.

 

그렇게 행복하고도 짧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이후 저는 신혼의 달콤함을 뒤로 한 채, 다시 응급실에서의 정신없는 일상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어느덧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났고 응급의학과 중환자실 주치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사진 픽사베이

 

어느덧 시간이 흘러 복잡한 중환자실 업무에 적응이 되어갈 무렵, 응급실에서 입원시킬 환자가 있다며 새로운 환자를 인계 받으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치료를 맡았던 동료의 인계 내용은 20대 중반 남성이 특별한 외상없이 갑자기 쓰러져 119 구급대원이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응급실에 도착했다고 했습니다. 응급실에서만 40분, 현장에서부터는 한 시간에 가까운 심폐소생술을 한 결과 지금 막 심박동이 돌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심폐소생술을 오랫동안 지속하면 심장 기능이 돌아오더라도 저산소성 뇌손상이 심해 뇌사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무의미한 심폐소생술을 중지하고 사망 선언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 경우엔 워낙 젊은 사람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왔으니 포기하지 말고 좀 더 해보자 하여 심폐소생술을 지속하다 심박동이 돌아온 모양이었습니다. 오랜 심폐소생술 동안 들어간 많은 수액으로 환자의 얼굴은 심하게 부어있었고 손발은 차가워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어렵게 심장 기능이 돌아온 직후 확인한 환자의 머리 CT 결과는 약간의 뇌부종만 보였습니다. 약물이나 외상의 상황도 아니고, 심근경색이나 뇌출혈의 증거도 없이, 젊은이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심정지. 아무래도 부정맥 등 심장 원인에 의한 심정지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응급실 의료진들은 환자의 젊은 나이 하나에 한줄기 희망을 걸고 환자의 체온을 강제로 34도로 낮춰 뇌부종과 뇌 손상을 최소화하는 저체온 치료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응급실에서 나온 검사 결과들을 확인하고 앞으로 환자의 치료를 맡게 될 주치의로서 입원 설명을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환자 가족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어렵게 심장 기능이 돌아왔지만 큰 기대는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임을 설명했습니다. 환자 부모님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앞날 창창하고 결혼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아들이라며 적극적인 치료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사진 픽사베이

 

중환자실로 옮겨진 환자는 동공 반응과 자가 호흡이 없는 상태로 뇌부종을 줄이는 약물치료와 수액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혈압이 낮아 바로 시작하지 못했던 저체온 치료는 다행히 강심제를 사용하면서 혈압이 올라 그날 밤부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체온 치료를 시작하고 다음날 아침, 회진 준비를 하면서 환자를 확인하던 중 약하게 동공 반응이 돌아온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동공 반응이 생겼다는 것은 뇌압이 떨어지고 뇌부종이 좀 풀려가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저 또한 희망을 가지고 세심하게 치료를 지속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다음날이 되니 동공 반응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뇌부종이 악화되면서 뇌압 상승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입니다. 이후 진행된, 환자에게 최소한의 뇌 기능이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뇌간 반응 검사는 모두 반응이 없었습니다. 뇌파검사 또한 매우 약한 뇌파 소견을 보이고 있어 곧 뇌사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습니다. 사실 이렇게 되면 환자가 다시 깨어날 가능성은 없는 상황입니다. 의료진으로서는 보호자께 차선책을 얘기해야 하는 힘든 순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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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 오신 환자 가족을 모셔놓고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의식이 깨기를 기대하긴 어렵겠다고, 환자분이 혹시 평소 장기기증에 대한 뜻을 표현한 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환자 아버지는 절대 그런 일은 없다며 제 손을 꼭 붙들고 제발 아들 좀 살려달라며 눈물을 흘리시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너무도 잔인한 질문이었겠지요. 그러면서 아버지는 제게 아들의 평소 모습에 대해 한참을 넋두리하듯 쏟아내셨습니다.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최근 결혼을 하면서 아이가 행복해했다는 얘기까지.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저는 환자에게서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에다 같은 시기에 결혼도 하고, 결혼 때문에 집에 손 벌리기 싫어해서 돈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는 것까지, 여러 면에서 말입니다.

 

사진 픽사베이

 

그날 저녁, 간호사로부터 환자의 부인이 주치의인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는 분인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때까지는 보호자 중 한 사람으로 얼핏 지나치기만 한 까닭에 누구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부인을 만나 얘기를 듣고 보니 그제야 한 달 전, 발리에서의 신혼여행에서 만났던 커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아, 이런 운명의 장난이 있단 말입니까?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신혼여행에서의 인연이 겨우 한 달 남짓 뒤에 이렇게 주치의와 보호자의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요. 게다가 환자의 상태는 이렇게 절망적인데 말입니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저는 주치의로서 그 자리 그 상황에서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랬던 것처럼, 남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 그때 그분이시군요, 환자 상태가 좋지 않아 유감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섭섭하셨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차마 경과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부인을 만나 따로 인사할 용기를 내지 못한 저는, 이후 중환자실 주치의를 마치고 응급실 당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정신없는 응급실 당직 스케줄에 파묻혀 다시 한 번 면회를 갈 여유도, 아니, 용기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가족들의 눈물 속에 겨우겨우 생명의 끈을 이어가던 환자는 제 손을 떠난 며칠 뒤, 제게 왔을 때처럼 그렇게 다시 심장이 멈췄고, 그렇게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봄을 맞아 화려한 꽃들의 환영을 받으며 신혼여행을 가는 행복한 커플들을 보고 있으면 전, 저와 비슷한 것이 참 많았던, 친구 같았던 그 환자와 부인의 슬픈 눈물이 생각납니다.

 

 

저자 소개

어린 시절, 온도계를 깨서 맛을 보다 응급실에 실려가 위세척을 받았고, 여자아이에게 주사 놀이를 한다고 눕혀 놓고 엉덩이를 연필로 찌르다 혼쭐났던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가 커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의사와 환자, 의료인과 시민은 ‘건강’이라는 한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 친구이자 동반자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 때문에 이해의 장을 만들고자 ‘응급실 이야기’라는 소재로 블로그에 글을 연재해 왔습니다.

현재 김포 뉴고려병원 응급의학과장으로 재직 중이고 요셉의원 의료봉사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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