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무척 사랑했던 연인과의 이별은 마음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줍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입맛도, 의욕도 전부 사라져 버리지요. 밤이 깊도록 쉽게 잠들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에 짓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어느새 잠들어 버린 자신과 조금은 무뎌진 감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또다시 울고 괴로워하겠지만 날이 갈수록 슬픔의 농도는 점점 옅어질 것입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일까요. 하룻밤의 단잠이 예상치 못했던 치유를 선물할 때가 많습니다. 자고 나면 생각을 옭아매던 고민이 가볍게 느껴지기고, 별안간 해결책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는 ‘잠’의 놀라운 효과 때문입니다. “푹 자고 나면 다 괜찮다.”는 어른들의 말이 꽤 근거 있는 말이었던 것이죠.

사람은 하루 중 3분의 1 정도의 시간을 수면에 할애합니다. 수면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 ‘비렘(REM) 수면’과 ‘렘 수면’으로 나뉩니다. 비렘 수면(non-rapid eye movement sleep, 조용한 수면) 상태에 빠지면 눈꺼풀 안의 눈동자가 거의 움직이지 않을 만큼 미동도 없이 잠들게 됩니다. 심장 박동수가 안정적으로 나타나며, 뇌의 활동 역시 매우 느리고 규칙적이죠. 얼굴 표정 또한 안락해 보일 뿐만 아니라 호흡이 느리면서도 일정합니다.

렘 수면(rapid eye movement sleep, 활성 수면) 상태에서는 우리가 보통 깨어 있을 때 나타나는 ‘베타파(Beta waves)’가 확인됩니다. 자고 일어났는데 내내 어떤 생각을 했던 것 같은 경험을 한 적 있나요? 그렇다면 렘 수면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경우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가 자주 움직이고 심장 박동수와 혈압, 그리고 호흡이 매우 불규칙합니다. 이 단계에서 꿈을 꾸면 꿈의 내용을 쉽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수면은 약 4분의 1이 렘 수면이고, 나머지 3 정도가 비렘 수면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자는 동안 계속 번갈아 나타나지만, 나이가 들수록 렘 수면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미국심리학회(APA)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자는 동안 꾸는 ‘꿈’을 분석한 결과 수면, 특히 렘 수면 상태가 정서적 조절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렘 수면에 빠지면 낮 동안 느꼈던 감정적 경험과 자신의 정서적 네트워크를 결부해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연결과 조정을 통해 다음 날에도 감정적 반응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지요. 

즉, 오늘 하루 동안 경험한 정서들을 앞서 축적된 정서 네트워크와 연결시켜 감정적 반응에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러한 감정이 강력하게 각인되지 않도록 독특한 생물학적 환경을 제공해 덜 불안한 상태로 이끌고, 고통을 완화합니다.

미국 한 병원(Rush-Presbyterian-St. Luke’s Medical Center)의 수면연구 센터에서 진행한 실험은 렘 수면과 꿈의 이러한 작용을 좀 더 명확히 보여줍니다. 연구진은 배우자와 이혼 혹은 별거 중인 사람 214명을 상대로 1년간 잠의 패턴을 연구했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은 꿈을 꿀수록 결혼 생활의 트라우마를 더욱 잘 극복했으며, 우울증도 현저히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꿈을 꾸는 동안 기억의 부산물이 씻겨 나가며 머리가 맑아지고, 트라우마도 깊이 남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치유 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연구자는 “꿈은 하룻밤의 치료(overnight therapy)와 같다.”며 우리들의 정서적 고통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서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자는 동안 꿈을 꾸면서 완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꿈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악몽은 낮 동안의 활동 가운데 자신의 정서에 영향을 미쳤던 경험으로 인해 꾸게 됩니다. 비록 악몽이지만 꿈을 꾸며 그러한 감정을 해소하게 되는 것이죠. 흔히 “꿈은 반대”라고 하지요. 악몽을 통해 정서적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임을 감안하면, 적어도 악몽에 관해서 만큼은 그 말이 사실인 셈입니다.

이러한 효과는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화학 물질 때문에 나타납니다. 생존에 위협을 받을 때 도망가거나 싸울 수 있도록 몸의 긴장 상태를 유지시키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진정 작용을 하는 물질입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는데요. 사람들이 꿈을 꾸면서 정서적 반응이 나타날 때 이 노르아드레날린이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자는 동안 머릿속에서 왕성하게 벌어지는 꿈의 작용이 심적 고통의 감소를 돕습니다. 그러니 혹시 고민이 있다면 잠시 생각을 멈추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요? 지독한 악몽을 꿨더라도 괜찮습니다. 하룻밤의 꿈이 쌓이고 쌓여 마음을 치유해 줄 테니까요.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전문의 홈 가기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