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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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저에서 극우 성향의 사람들의 시위가 문제가 되고 있다. 또 여기에 대한 맞불의 성격으로 극좌 성향의 사람들이 서초동 윤석열 대통령의 자택 앞에서 시위를 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로 인한 주변 주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뉴스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뉴스 보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일반 시민들도 그 피해가 작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인데, 직접 그 안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피해를 모르지는 않을 터다.

그런데도 자정 노력은 줄지 않고 더 대립하고 극단화되는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사람들의 존재는 비단 지금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해 왔다. 단지 지금은 유튜브 등 SNS의 발전으로 더 많이 알려지고, 더 극단화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과거부터 계속 이러한 사람들이 존재해 왔다면, 이것은 사람들의 기저 심리의 문제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오늘은 정신건강적인 측면에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정신과 의사로서 감히, 이들에 대해 분석해 본다면, 이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 즉 자존감이 저하된 상태일 확률이 높다. 스스로는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자존감의 저하는 이러한 극단적인 형태의 표현 방식을 불러오곤 한다. 그리고 또 자존감이 저하된 사람들은 이러한 자극적인 표현에 동화하고 그 안에 소속되고 싶은 심리가 있다. 집단의 응집력은 소속된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며, 이 집단의 응집력은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공고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구독자를 늘리고 수익을 창출하는 유튜버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세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작점은 ‘적’을 규정하는 것이다. ‘적’이 명확하게 있는 것과 ‘적’이 명확하지 않을 때의 집단 응집력의 차이는 무지하게 크다. 자존감이 저하되고 집단의 응집력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적의 규정’은 필수요소인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심리 실험이 하나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어린아이들을 모아 놓고 게임을 시켰다. 처음에는 서로 잘 어울리면서 게임을 진행했었으나, 실험 설계자가 하나의 장치를 넣었더니, 이들이 서로 편을 나누고 적을 비방하며, 같은 편끼리 공고해지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 장치가 무엇이었냐고? 단지 그냥, 참가 아이들의 반은 빨간 옷을 입혔고, 다른 반은 파란 옷을 입혔을 뿐이었다. 빨간 옷, 파란 옷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지만, 이 작은 조작 하나에도 아이들은 편을 나누고, 적을 규정하며 자기들끼리 공고해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결국 사람의 본능 기저에는 어떤 대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안정감을 위해 ‘적이기만 하면 되는 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실험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다. 성숙한 성인이라면 이러한 본능적인 안정감을 위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정신과 의사로서 생각해 본다. 바뀌어야 할 대상은 ‘적으로 규정된 그들’이 아니라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본인 자신일지도 모른다. 손가락질을 할 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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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극우든, 극좌든 극단적인 주장을 취하는 집단은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수많은 하얀 동그라미 속에 빨간 동그라미가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죠. 이 안에서 보통 무엇이 제일 눈에 띌까요? 다들 빨간 동그라미라고 말씀하실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대부분은 하얀 동그라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빨간 동그라미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비슷한 겁니다. 사실 인간사 대부분의 진실은 중간 어디 애매한 지점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양 극단은 답일 확률이 상당히 적습니다. 그래서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매한 어떤 지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극단적인 무언가를 표현한다면 눈에 띌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는 이 효과가 더 커집니다.

만약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한다면, 진실은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는 공과가 있다.’에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요. ‘100% 공적만 있다. 100% 과오만 있다.’가 진실일 확률은 0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극우 성향의 집단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는 공과가 있다.’라는 주장을 핀다면 어떤 반응이 예상되시나요? 상상이 되시죠? 이 집단 안에서 합리적인 내용은 부재한 채 욕만 나열한다면 어떤 반응이 예상되시나요? 상상이 되시죠? 사람들은 다들 이 지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자극적인 주장과 더 과격한 방법에 매몰되는 것이죠. 양산 사저에서 시위를 하는 한 분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이런 것이 잘 드러납니다. 

 

Q. 이렇게 세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A. 이래야 팍 들어오거든. 너저분하게 무슨 우리가 국가 원로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오랫동안 연단에 서서 말하는 걸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합니다.

 

Q. 유튜브 등 SNS의 발전이 사람들을 더 극단화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유튜브나 SNS의 발전은 콘텐츠 경쟁의 장을 무한으로 넓혀 주었습니다. 과거에는 어떠한 주장이 있더라도 20~30명의 주변 지인들을 통해 퍼졌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경쟁해야 하는 콘텐츠의 양이 20~30개이기 때문에 조금만 극단적이어도 눈에 띠일 확률이 생깁니다. 하지만 유튜브나 SNS 같은 곳에서는 조금 극단적인 주장은 널리고 널렸기 때문에 눈에 띠일 확률이 줄어듭니다. 이렇게 되면 더 극단적인,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주장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과거에는 지인들 사이에서 주장들의 경쟁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데요. 지인들 사이에서는 너무 극단적인 주장을 필 경우, 부정적인 피드백이 생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정작용이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맺어 온 지인이라면 그 안에도 다양한 정치 성향이 섞여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너무 한쪽으로 치우칠 경우, 지지받기가 어려워집니다. 극단적인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1%라고 가정을 했을 때, 20~30명 중에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 확률은 채 한 명도 되지 않겠죠.

하지만 유튜브나 SNS는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는 기능이 더 큽니다. 이 경우 극단적인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1%라고 하더라도, 그 절대적인 수는 많이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유튜브나 SNS는 끼리끼리 모이게 하는 지점도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되면, 내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더 극단적으로 치우치게 하는 힘이 되게 되는 것이지요. 유튜브의 알고리즘도 한몫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클릭하는 콘텐츠와 비슷한 콘텐츠를 계속 추천해 주기 때문에 기존의 내 생각이 더 공고해지고, 더 극단화되는 경향을 유튜브 알고리즘이 과속화하는 점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Q. 이런 극단적인 주장들이 유독 정치 분야에서 심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는 어떤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A. 관련해서 비슷한 실험이 있어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 그룹은 1900년 미국의 인구가 몇 명인지에 대해 토론을 해 보라고 했고요. 다른 그룹은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에 대해 토론을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전자의 그룹(미국 인구)에서는 서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였는데, 후자(사형제도 찬반)의 경우에는 주장들이 서로 양극단으로 나뉘어 점점 더 극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자는 사실에 대한 문제여서 감정이 개입될 소지가 적은데, 후자처럼 사회적 문제에는 감정이 개입되기에 극단화가 잘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실험을 통해 본다면 유독 정치 분야에서 극단적인 주장들이 많은 이유가 설명이 될 거 같습니다. 

 

Q. 그렇다면 사회적 문제에 감정이 많이 개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A.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선 실험에서 1900년 미국 인구가 몇 명이냐는 문제의 경우, 명확한 답이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감정을 많이 실어서 과격하게 주장을 한다고 해서 내 답이 채택될 확률이 적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문제는 다릅니다. 명확한 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감정을 실어서 과격하게 주장하는 방법이 때로는 먹힐 수도 있습니다.

과거 진화 역사에서 이런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갈등은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해 왔습니다. 때로는 폭력을 동반한 과격한 주장은 사회적 합의로 관철시키는 데 큰 힘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전쟁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나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잘 체감되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역사는 대부분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질서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각국이 다 자신의 화폐를 기축통화로 쓰고 싶어할 텐데,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런 질서는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힘을 동반한 과격한 주장이 사회 질서로 자리 잡는 그러한 진화 역사를 경험했었기 때문에,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사회문제를 논의할 때는 나 스스로도 모르게 감정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사회문제를 논의할 때 우리 모두가 감정을 배제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이 사회는 좀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이상적인 상상을 해 보게 되네요. 이상적인 상상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사람은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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