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스물 후반의 남자입니다. 저는 학창 시절부터 영화를 볼 때 조금이라도 어려우면 집중을 못했고, 책을 읽을 때도 겉핥기 식으로만 읽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멍 때리는 경우가 많아 유독 국어 성적이 안 좋았고, 항상 시험에 노력하는만큼 결과가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성인이 되고 스물 중반의 나이에 첫 공무원 시험을 도전했을 때만 하더라도 어릴 때라 그랬을 거야 하며 의욕이 넘치고, 각종 시험에 불합격하더라도 금방 딛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몸도 마음도 건강했는데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 낙방 이후부터 슬슬 정신적으로 변화가 일어난 걸 감지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험 점수는 남들이 6개월 하면 얻는 점수보다 못 미치고, 내 공부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완벽주의자 성격을 갖게 되었고, 수많은 공부법을 다 써 봤는데도 성적은 항상 밑바닥이었습니다.

공부 중간에는 직렬을 바꿔 실기시험이 있는 경찰공무원으로 전향했지만 실기를 병행하기 위해 맨몸운동과 헬스를 아무리 해도 3~6개월이면 만점을 받는다는 팔굽혀펴기조차 일정 개수 이상 늘어나지 않아서 좌절한 경험이 있습니다.

뭐 하나 잘난 거 없고 잘난 재주도 없어서 점점 제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음악을 들어도 예전과 같은 즐거운 감정이 안 생기고, 뭘 하고자 하는 의지나 욕구가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결국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게 되었고, 공부 중간에 친한 친구와도 연락이 끊겨 무기력한 감정이 더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을 방문했더니 약간의 우울 증세가 보인다며 약을 처방받았는데 3주가량 먹어도 전혀 진전이 없어서 그냥 중단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은 취업을 했지만 최근 1년 사이 정신적으로 모든 게 너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는 느낌을 받네요. 방 청소하는 것도 귀찮고, 게임도 다 재미없고, 남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귀찮아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애하는 것도 자꾸만 실패하고, 외모에 대한 자신감도 너무 많이 떨어져서 이제는 그냥 하루하루 숨만 쉬며 회사만 다니고 있습니다. 헬스도 오랫동안 했지만 실기 준비할 때 한계를 느낀 경험과 이제는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어서 운동을 안 한 지 오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뭘 하고 싶다는 의욕이 완전히 사라지고 해서 뭐 하나 이런 기분만 드네요. 딱히 우울하다는 감정은 없는데 제 안의 어떤 행복, 의욕과 같은 감정들이 사라진 기분입니다.

제가 궁금한건 나이가 들어 단순히 몸에 노화가 온 건지, 아니면 우울증 혹은 번아웃이나 무기력증인지가 궁금합니다. 최근에 일주일에 주 3회씩 30분 달리기를 두 달가량 꾸준히 했는데 딱히 기분이 나아졌다거나 의욕이 돌아오거나 하진 않네요.

어떻게 해야 예전과 같은 마음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사연 잘 읽어 보았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오래 준비하다 포기하고 지금은 취업한 상태이신데요, 과거 중요한 시험에 도전하고 실패한 경험이 분명 사연자님께 여러 가지 심리적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 번의 불합격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회복탄력성도 상당히 갖추고 있었고, 좋은 결과를 위해 노력을 정말 많이 하셨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끈기와 성실성은 사연자님의 좋은 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방면에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가시적인 성과가 안 나와서 많이 답답하고 좌절스러우셨을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좌절이 누적되면 자신에 대한 회의감을 깊게 느낄 것입니다. 자신이 특정 영역에서 뛰어난 모습이 없음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현실적이고도 씁쓸한 경험입니다. 

자신감’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적절한 성취와 좌절이 필요합니다. 성취 경험을 통해서는 자신의 고유한 능력과 자원들을 확인하고, 좌절 경험을 통해서는 자신의 한계와 단점들을 확인합니다. ‘자원’과 ‘한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바로 자신에게 최선인 삶의 목표를 정립하고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자원이나 한계를 아는 일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그래서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연자님께서 비록 실패 경험이 여러 번 반복되며 많은 고통을 겪으셨지만, 그 고통을 의미 없는 실패로만 정의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연자님이 무엇을 잘하는지 아는 일만큼이나, 무엇을 잘 못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아는 일 역시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자신의 한계나 단점을 확인하는 경험을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다들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죠. 만약 이를 어떻게든 강박적으로 회피하면 어떻게 될까요? 일단 장점은 부적절하게 과시하고, 단점은 부정하는 태도가 형성되고, 진정한 자기 모습에서 더 멀어집니다. 자기가 되고 싶은 자아상에만 집착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한계를 수치스러워하고, 부정하는 습관이 생길 수 있습니다. 대인관계에서도 타인의 한계나 단점이 드러날 때 수용하기 어려워 갈등이 생깁니다. 자신의 한계를 부정하고 크게 실망했듯 타인의 한계에도 실망하기 때문에 관계를 쉽게 포기합니다. 여러모로 사람에 대한 비현실적이고도 경직된 관점이 형성되는 것이죠. 사람의 잘나지 못한 모습, 취약하고 나약한 면들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행동은 언젠가 탈이 납니다.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하고 영원히 검열해야 하는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단점이나 능력 부족, 한계, 취약성 등은 물론 나아지거나 극복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그저 수용해야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잠언집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구하는 내용이었는데 아마 익숙하실듯합니다.

 

사연을 보고 감탄했던 것은 이 용기와 지혜를 사연자님이 이미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연자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한 면에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실패하면서도 부족한 모습을 아주 처절하게 직면하는 대단한 용기를 냈습니다. 문제라고 생각한 특성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하셨습니다. 시험 직렬도 바꾸고, 각종 공부법도 적용하고, 인지검사도 하고 병원도 가셨습니다. 당연한 노력들이 아닙니다. 사연자님은 자기 한계를 수용하는 지혜와 변화를 위해 용기를 쏟을 수 있는 중요한 자원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를 새롭게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 무기력하고 의욕이 저하된 상황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사연자님에게는 성취 경험에 비해 좌절 경험의 비율이 더 높은 몇 년을 보내셨습니다. 자신의 한계에만 몰두하며, 부족한 모습에 집착하기 쉽습니다. 완벽주의자적인 특성도 그러한 맥락에서 형성됩니다. 자신의 한계와 단점만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특성을 ‘문제시’하고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붓고 결국 소진이 온 것입니다. 완벽주의적인 태도로 자신을 검열할 때는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실패 경험을 크게 지각하면 이후에 성취한 경험들이 쌓여도 이를 있는 그대로의 성취로 잘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전의 실패와 비교하며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그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실패는 과거 경험이고 현재 사연자님이 매일 매일 쌓는 일상에도 작은 성취들이 모여 있습니다. 

일주일에 주 3회씩 달리기하는 것뿐 아니라, 회사에 취업하여 매일 출근하는 일도 중요한 성취 경험이며, 사연자님의 좋은 자원을 활용하고, 새로운 능력을 키울 기회입니다. 사연자님은 예전 상태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느냐고 질문하셨는데요, 아쉽게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이미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과거 좋았던 상태로 회귀할 수 없습니다. 그저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초반에 말씀드렸지요. 한계를 확인하는 경험은 충분히 쌓았으니, 이제는 자원을 확인하고 활용하는 성취 경험의 비율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나에게 최선인 삶의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공무원 시험이나 취업은 비교적 단기적인 목표였습니다. 이제는 장기적인 삶의 목표를 세우세요. 사연자님이 앞으로의 삶에서 어떤 목표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일상에서 하는 일들의 우선순위를 다르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감정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면, 그 감정을 유발하는 경험들을 최우선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일상에서 대인관계를 위한 노력을 쏟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사연자님에겐 장기적인 목표를 바탕으로 한 중기, 단기 목표를 단계적으로 세우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할 때, 기분도 좋고 자신감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기력감은 빨리 없어지지 않을 수 있는 감정입니다. 빨리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감정으로 해석하지 마시고, 사연자님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임을 먼저 수용해 주세요. 과거의 좌절 경험 때문에 자아가 위축된 상황에서 불쑥 언제라도 다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그때 참 많이 힘들었구나. 한 번 더 공감해주라는 마음의 신호구나.’ 이렇게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정서,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앞으로 많은 실험이 필요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입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어떤 경험들이 행복감을 주는지 잘 모른다면, 막연하게 타인들이 권유하는 경험들을 모방합니다. 아직 사연자님은 자신이 어떻게 살면 비교적 행복감을 자주 느낄 수 있는지 모르는 것뿐입니다. 작은 성취 경험을 많이 반복하셔서 자신의 능력과 자원을 새로 확인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세요. 그 과정에서 의욕도 조금씩 돌아오고, 행복감도 불쑥 느끼는 순간이 올 겁니다. 그게 비록 일시적이고 작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원래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사연자님께서 앞으로 달리기를 할 때, 달리기로 인한 효과를 기대하며 뛰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출발하세요. 달리는 그 행위 자체에 생각 없이 몰입하시고, 그 순간 자신의 호흡, 떨림, 움직임, 주변 풍경들을 마음에 담으세요. 달릴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려고 관심을 기울이세요. 불쑥 재미, 충만감, 편안함 등 긍정적인 정서를 느끼는 순간이 올 겁니다. 그게 행복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작은 경험들입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사연자님께 많이 쌓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앞으로의 삶을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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