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센텀숲 정신과, 김민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게 독특한 점이 있어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독특한 점이란 불안, 슬픔을 감정으로 느끼지 못하고 신체 반응으로 느끼는 점입니다.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사소한 것에 불안해하고 슬퍼해서 잠을 못 자곤 하는 까다로운 아이였어요. 7살 때부터 몇 년간 불안하다는 이유로 혹은 밤에 갑자기 감수성이 풍부해져서 어른들 몰래 우니라 불면증에 가깝게 잠을 못 잤어요. 당시 지속된 수면 부족 때문에 입술이 매일 피딱지가 져 있었죠.
불안한 이유는 다양했어요.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워서, 부모님이 돌아가실까 봐, 시계의 불빛이 빨간색인 게 무서워서... 슬픈 이유도 다양했고요. 정말 어이없는 이유로는 창밖의 빗소리를 들었더니 너무 슬퍼져서 운 적도 있어요.
그러다 질풍노도의 시기, 중학교 2학년을 맞이하게 될 때 이 불안과 슬픈 감정은 정점을 찍었고요. 이때는 병원에 가보지 않았지만, 거의 우울증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두 달 내내 한시도 빠짐없이 우울하고 불안했거든요. 불안할 때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증상도 있었고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조금씩 나아지더라고요. 특히 저는 제 예민함을 둔하게 만들려고 감정을 무디게 하는 연습을 했거든요. 밤에 갑자기 우울해질 때는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버리거나 갑자기 불안해질 때는 이건 불안한 게 아니라 즐거워서 흥분한 거라고 자기 세뇌에 가깝게 되새기곤 했거든요. 이 자기 세뇌는 효과가 좋아서 면접을 볼 때나 중요한 시험을 칠 때도 요긴하게 써먹었고요.
그런데 이제는 너무 무뎌진 건지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아요. 얼마 전에 가족 중에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거든요. 저는 그래서 제가 슬프지 않은 줄 알았는데, 몇 주 내내 가슴이 갑갑하고 숨 쉴 때 느낌이 이상해서 제가 그때 슬펐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어요. 사실 아직도 슬프다는 게 마음으로 와닿지는 않는데 그냥 이성적으로 나는 슬프다 라고 이해한 것 같아요.
불안도 저는 제가 병원에서 긴장하는 줄 몰랐거든요. 그런데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맥박이 120회를 넘어가서 처음에는 심장질환인 줄 알았는데 집에서 편안히 쉴 때는 맥박이 낮아지기에 제가 그때 긴장해서 맥박이 높게 나왔다는 걸 알았어요.
요새는 우울한 때가 있기는 한데 잘 울지 않다 보니 제가 우울한지도 확신이 없어요. 그냥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내가 우울하다는 거겠지라고 판단할 뿐이고 바로 내가 우울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자꾸 자기 세뇌하듯이 감정을 무디게 만들려는 시도가 절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감정을 느끼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센텀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민수입니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불안, 슬픔이란 감정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고 신체로 느끼는 경험에 대해 적어주셨네요.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외면함으로써 발생하는 신체적 증상을 정신의학에서는 '신체화'라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비슷한 증상과 경험으로 진료실을 찾고 있습니다. ‘신체화’를 경험하는 분들은 많지만, 그 이유는 저마다 다릅니다.
올려주신 조각 글에서 7살 때부터 '어른들 몰래 우느라 잠을 못 자고', '사소한 것에 예민해하고 불안해하는' 민감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7살의 나이에 불안하고 우느라 밤새며 입술에 피딱지가 앉을 정도였다니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제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워서, 부모님이 돌아가실까 봐, 시계의 불빛이 빨간색인 게, 그 여린 마음을 두렵고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들은 그 나이 또래라면 한두 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것들입니다. 다만, 그 생각들이 오래 머무르고 점점 커져 가며 마음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든 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민감하고 예민했던 감수성은 사춘기 시기에 더 격렬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 감정들이 너무 버겁고 낯설어서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감정을 숨기고 세상에 당신을 맞추었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예민함'을 '둔감함'으로 바꾸기 위해,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나의 감정이나 욕구를 무시하는 쪽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덕에 중요한 시험이나 면접을 무사히 넘겼지만, 점점 나의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되셨고요.
그런 방식으로 자신만의 ‘신체화’를 만들며 불편한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지켰지만, 지금은 그 신체 증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씀하시네요. 또한, 감정을 느낄 수도 표현하기도 어렵고 가슴이 답답한 신체증상을 통해 나의 감정을 ‘판단’ 하신다고만 하셨고요. 이런 증상을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감정표현 불능증(alexthymia)라고도 합니다. 1976년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존 네마이어(J.C. Nemiah)는 그리스 어원인 a[없음]lexis[발언]thymos[감정]에서 이 개념을 설명하였습니다.
이 감정표현 불능증은 다양한 신체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과 상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후의 연구들에 따르면 이런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신체증상과 상당히 연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신께서 중학교 때 경험하신 것처럼 힘든 경험을 한 후 잘 나타납니다.
당신께서는 나를 지키려고 했던 방어적인 행동들이 지금의 마음을 만든 건 아닌지 이미 알아차리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미 알아차리신 것만으로도 어느새 메말라 버린 마음에 물을 주기 위한 준비는 끝났습니다. 감정을 우리의 마음에 담으려면 먼저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감정을 알아차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혼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건 감정에 대한 일기를 써보는 것입니다. 마트에 가면 물건마다 ‘라벨링’이 되어 있듯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여 언어화해보는 것입니다.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감정에 대한 단어를 나열해 놓고 내가 지금 느끼는 가장 비슷한 감정에 이름을 붙여가며 적어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명상도 있습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명상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신체 감각부터 떠오르는 마음의 심상까지 관찰하며 보는 것이 감정을 알아차리는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혼자 하기가 막막하고 두려우시다면,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셔도 좋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치료자와의 관계 및 대화를 통해 내 감정을 알아차리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상담을 통해 내가 무엇으로 인해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게 됐는지, 감정을 억압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알아차릴 기회를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 되었든 다시 자신의 감정을 만나러 가기로 한 용기에 응원을 보내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