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권태기, 식물집사는 식태기

권태기의 본래 의미는 결혼한 부부 사이의 권태를 느끼는 시기를 뜻한다. 그러나 요즘은 ‘연애 권태기’, ‘인생 권태기’, ‘직장 권태기’, ‘인간관계 권태기’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온 권태란 어떤 이름일까? 스스로에게 ‘식태기’가 왔다고 표현한다.

식태기의 현상으로는 이전 일상보다 식물을 들여다보는 횟수가 현격히 줄어든다. 일단 눈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식물을 들이는 횟수도 줄어든다. 식물이 늘어나면, 내 일만 늘어난다는 식으로 계산이 된다. 장바구니에 담겨있던 엄청나게 원하던 식물이 아닌 이상 ‘예쁘다’하고 구매는 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장씩 찍던 식물 사진도 찍지 않게 된다. ‘어디를 봐도 예쁜 내 새끼’였는데, 휴대폰이나 사진기를 잘 들지 않게 된다. 정말 간신히 물만 준다. 사실, 물을 건너 띄게 되기도 한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식물을 길게 키워본 사람들은 대부분 한 번씩 겪어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는 식태기와 정신건강이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 기분이 한없이 떨어지고, 무엇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가 있다. 비유하자면 내 마음이 벼랑 끝에서 힘껏 버티다가 하염없이 낙하하는 기분이다. 이때의 나는 가만히 누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을 자지도 못한다. 밥시간이 지났는데도 보채지 않는 강아지들을 보며, 죄책감이 가득한 무거운 심정으로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이것만 하고 어서 누워야지.’ 밥과 물을 챙겨주고, 나는 약도 먹지 못하고 침대를 향해 직행한다. 그 길목에 식물이 잔뜩 말라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 할까.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억지로라도 물통이 줄지어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정말 대충 급한 친구들에게라도 물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에너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는다면, 나에겐 자연스레 식태기가 찾아온다. 이미 물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쌓여 있기 때문에 ‘될 대로 돼라.’라는 무자비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예를 들자면, ‘현생의 고단함’이다. 취미도, 현실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야 유지가 되는 일이다. 현생이 너무 힘들면, 취미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고단함에서 치유받고자 식물을 들이는 것이지,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자 식물을 들이는 것이 아니다. 현생에서 오는 피로감이 너무 크다면, 취미고 나발이고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할 일이다.

 

다음은 ‘연달은 사망선고’이다. 식물이 연달아 죽어나면 슬픔, 다음 슬픔, 또 다음 슬픔이다. 죽음이 중첩되면 타격이 크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겨울에는 많은 식물 덕후들에게 식태기가 찾아온다. 여름의 부지런한 물시중(정말 부지런히 물을 퍼다 날라야 한다)을 지나 가을을 지나, 손도 훨씬 덜 가고 성장의 기쁨도 조금씩 사라져 간다. 열심히 키워 놨는데, 하나 둘 죽어가는 것을 보며 망연자실하게 된다. 흥미와 자신감 모두를 잃는다.

 

 

식물은 레고가 아니다. 열심히 만들어 뒀다가 망쳐지더라도 다시 만들 수 없다. 오히려 바닷가 모래와 같아서, 열심히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든, 글씨를 쓰든 간에 파도가 한 번 휩쓸고 가면,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겨울의 찬 공기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허무한 죽음만이 남는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간 열심히 키워 놓은 식물이 하룻밤 사이 찬 공기에 얼어 죽어버린다면 그 허무함은 어떠한 것도 대신할 수 없다. 금세 다시 식물을 채워 둔다고 해도 그때 그 식물이 아니다. 겨울의 식태기는 상실감으로부터 시작한다.

 

권태기란 어떤 형태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처음엔 그것이 ‘부부’의 형태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회사와 나’, ‘연인과 나’, ‘주변인과 나’ 등으로 다양한 관계 속 권태함이 생겨났다. 권태기라는 말이 처음 쓰일 때만 해도 ‘식태기’라는 말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왔지만, 모든 권태함의 특징은 ‘한때는 불타는 열정으로 대하였던 것들’이라는 점이다.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했고, 연애 초반만 해도 최선을 다해 사랑을 표현했다. 모든 인간관계에 진지하던 시절이 있었고, 나 또한 모든 식물에 진심이던 시기가 있었다. 요새는 ‘하얗게 불태웠어.’라고 표현한다. 정말이지 표현 그대로 자신을 한 줌의 재로 남길 만큼 불태우고야 만다.

 

 

식태기가 온 식물 덕후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아낌없이 보내고 싶다. 식태기가 온 것은, 열정의 이면이고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 일지도 모른다. 식태기의 답은 늘 다시 식물에서 찾듯이, 벗어날 만한 식연을 꼭 만나길 바란다.

 

* 매주 2회 수, 금요일 글이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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