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29)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아, 이번 신입사원 중에 그 친구가 참 똑똑해 보였는데,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버렸네.”
“마케팅팀하고 영업지원팀에는 지원을 잘해주면서 왜 우리 부서에는 지원이 시원찮은 거야?”
“1분기 실적이 비슷한데, 옆 부서는 성과급 50%를 주면서 우리는 왜 30%밖에 안 주는 거지?”
강 대리는 오늘도 권 부장의 푸념을 들으며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느라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권 부장은 이른바 ‘프로불편러’다. 별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매사 불평불만을 늘어놓아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논쟁을 부추기는 사람이다.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특이한 재주를 지닌 존재다. 의욕적으로 일하려는 사람도,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려는 사람도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기운이 빠지고 의지가 약해진다. 그래서 다른 부서원들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그렇지만 강 대리는 권 부장 바로 앞자리라 조그맣게 구시렁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린다. 귀를 틀어막고 살 수도 없어 불편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권 부장의 불평불만은 회사나 다른 부서만을 대상으로 한 건 아니다. 자기 부서 직원들을 향해서도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심지어 직원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홀대한다고까지 생각한다.
하루는 견디다 못한 이 과장이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권 부장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췄다.
“저, 부장님……. 요즘 우리 부서원들이 다들 열심인데, 격려도 할 겸 회식 한 번 할까요?”
“열심? 무슨 열심? 그래서 성과급도 제일 적게 받나? 당신이 그러니 부서가 이 모양이지.”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저도 한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 둘이 오붓하게 술이나 마실까요?”
“오붓하게 좋아하네. 내가 당신하고 오붓할 일이 뭐가 있어?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이 과장에게도 이럴 정도니까 대리나 평사원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할 때도 많다. 한번 왕창 들이받고 속 시원히 사표를 쓸까 고민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이 불황에 옮겨갈 만한 회사도 마땅치 않다 보니 그저 꾹 참고 ‘참을 인’자를 새겨가며 출퇴근하는 상황이다. 권 부장은 다른 부서장들 사이에서도 악명 높다. 한 달이 멀다 하고 타 부서장과 말다툼을 벌인다. 멱살잡이까지 한 일도 있다. 그런 날은 불똥이 다른 데로 튀지 않도록 더욱 몸을 사려야 한다. 강 대리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조마조마하다. 작년에 권 부장 부서로 발령이 나서 일하는 중인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한 번도 그에게 심하게 깨진 적이 없지만, 자신에게 언제 그런 일이 닥칠지 불안하기만 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권 부장 같은 사람들이 있다. 마치 혼자 전쟁터에서 사는 사람처럼 좌충우돌 부딪히며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2000년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 만든 일본 영화 <배틀로얄>을 실제 촬영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교권이 무너진 교실에서 벌어지는 살인 게임을 다룬 이 영화 출연자들의 생존 방식은 ‘상대를 죽이고 나만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기도 무섭고,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 더 무섭다. 당연히 그 사람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상대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이를 의식하지도 불편해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딱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사람에게 섣불리 다가갔다가 오히려 의심이나 분노의 대상이 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어설픈 동정심을 거둬들인다.
이러한 성격을 ‘편집성 성격(Paranoid Personality)’이라고 한다.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항상 자신에게 해를 입힐 것으로 의심하며 언제라도 싸울 듯이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친한 친구를 떠올려보자. 이 친구에 대한 내 감정이 좋은 것만 있을까? 아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이다. 한 사람에 대해 하나의 감정만 가질 수는 없다. 그런데 편집성 성격을 가진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한편으로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 게 불편하다. 결국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모든 사람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고, 언제든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내 불편한 마음을 상대방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믿으려는 것을 투사(投射, Projection)라고 한다. 자신의 성격, 감정, 행동 등을 이해하거나 만족할 수 없을 때 이를 다른 사람 탓이라 여김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이다.
오랫동안 만나온 애인이 있다. 감정이 더 무르익지 않아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아프다. 나에게 헌신적으로 잘해준 사람인데, 헤어지고 싶다는 마음을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상대방은 나를 변함없이 대해준다. 이때 헤어지고 싶다는 마음이 내 것이 아닌 상대방의 것이라고 투사한다. 내가 보기에 나에 대한 그 사람의 사랑이 식은 것 같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그렇다. 다음에 만났을 때 상대방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요즘 너 좀 변한 것 같아. 나한테 질렸니? 나랑 헤어지고 싶어?”
권 부장이 이런 경우다. 내가 타인에게 해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데, 그런 모습이 원래 나에게는 없는 것이고 상대방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공격을 당하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라고 여긴다. 심지어 이런 사람은 내 분노의 감정을 타인이 느낄 수 있도록 특정한 상황을 만들어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대신 느끼게 만든다. 이를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고 한다. 앞에 나온 오래된 연인의 사례라면, 헤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약속도 어기고, 옷도 대충 입은 채 나가며, 평소 안 하던 이상한 행동을 함으로써 상대방이 나에 대해 매력을 상실하거나 아예 질려버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상대방이 ‘지금 내가 이 사람이랑 헤어지고 싶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이별의 책임은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있으며, 자신은 청순가련한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연인도 친구도 아닌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끼리라면 어떨까?
일단 싸우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화가 나도 참는 게 좋다. 한번 세게 들이박고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절대 금물이다. 내가 생각하는 싸움과 수준이 다르다. 상대방은 프로 싸움꾼이다.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고, 끝까지 싸울 태세가 갖춰진 사람이다.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 미국의 이종격투기대회) 선수와 일반인이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가 왜 이 사람에게 당하기만 해야 하지? 너무 억울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이 상황이 이 사람의 덫이다. 투사적 동일시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화를 내면 그는 반성은커녕 ‘아, 역시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평소 생각에 대해 더 확신한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타격을 입힐 수 없다. 그럴 정도의 사람이라면 이미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가 멀쩡한 걸 보면 이 정도로 끝날 싸움이 아니다. 나와 레벨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빨리 인정하는 게 편하다.
분노 혹은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공격당할까 봐 숨기려 하기보다는 공개할 수 있는 건 확실히 공개하는 게 낫다. 직장에서 상대방이 상사라면 본인이 통제력(A Sense of Control)을 잃었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보고를 최대한 자세히 해야 한다. 말을 섞는 게 불편해서 또는 꼬투리를 잡힐까 봐 보고를 거르거나 대충 하다가는 무시당한다는 기분을 줄 수가 있다. 내가 부하직원으로서 보고해야 할 것을 상세하게 보고함으로써 뭔가를 숨기거나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인상을 줄 경우, 그것이 도리어 분노와 의심의 빌미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애쓰는 티를 내면 오히려 상대방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은 상대방과 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그래야 안정감을 느낀다. 맨 처음 사례에서 이 과장처럼 사적으로까지 가까워지려고 시도하면 상대방이 더 불안할 수 있다. 일과 관련해서는 정확하고 자세하게 하되 감정적인 표현은 최대한 자제하면서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적정한 수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대방의 분노와 의심의 영역 안에만 들지 않도록 주의하면 된다.
불필요하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긴장을 유발하고, 타인이 자신을 공격할 거라 여기는 프로불편러들의 모습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들의 생존 방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투사할 수 있다. 권 부장이 언젠가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고 불안해하는 것이 실제로는 내가 어쩌면 권 부장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시작된 투사일 수 있는 것이다. 권 부장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나 혼자 지레짐작으로 사서 하는 걱정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나를 지키는 심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