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정정엽 전문의] 

 

응급실로 긴급 이송된 정인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자신을 향한 양모의 가혹한 학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입양된 지 271일 만에 세상과 쓸쓸히 이별하고 만 것이다.

여기서 만약에, 극적으로 정인이가 살아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손상된 장기와 부러진 골절 등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치료하면서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몸을 잘 돌보고 아물게 하는 일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동시에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만 한다. 아울러 양부모로부터 철저히 격리 조치한 후 치료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안전한 보호시설에서 정상적인 양육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 지금의 양부모와 파양하는 일은 서둘러야 하지만, 충분한 자격을 갖춘 좋은 양부모를 다시 만나는 일은 시간을 가지고 신중하게 진행하는 게 좋을 것이다.

 

보호자로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받으며 자란 아이의 몸과 마음에는 어떤 증상이 생겨날까?

양모가 정인이를 학대하는 장면이 찍힌 CCTV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온 걸 본 적 있다. 아파서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는 정인이에게 양모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나무라니까 정인이가 벌떡 일어나 똑바로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몸이 무너져 가는데도 양모의 위협적인 태도에 정신이 번쩍 들어 걸어가게 된 것이다. 트라우마로 뒤덮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뇌에 있는 편도체(amygdala)는 공포와 관련된 감정을 처리하는데, 특정 현상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되면 비슷한 상황이 조금만 보여도 공포감에 떨게 된다. 조건반사적으로 이에서 벗어나고자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정인이가 양모에게 보인 행동 반응이 이와 같다.

쥐나 개구리는 천적인 뱀과 마주하게 되면 온몸이 얼어붙어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즐겨하는 얼음 놀이에서 바로 그 얼음처럼 돼 버리는 것이다. 극한의 공포감 때문에 모든 것 마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다. 지속적인 학대에 시달려 양모만 보면 공포감을 느끼는 정인이로서는 양모의 동작 하나 표정 하나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폭력으로 이어질 상황이라는 게 직감되면 모든 사고와 행동이 멈춰 버린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스키마(schema)가 형성된다. 스키마란 정보를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인지적 틀을 말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에 의해 체계화된 개념으로 자신에게 의미 있는 외부 정보를 조직화하고 통합하는 기능이다. 그는 아동의 지적 발달에 기여하는 개념이 스키마라고 보았다. 피아제에 의하면 스키마는 새로운 경험을 기존의 스키마에 동화하거나, 새로운 경험에 맞춰 기존의 스키마를 조절하는 과정을 거쳐 수정되고 변화된다. 오랫동안 폭력에 노출됐을 때 이게 잘못된 거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잘못이 있어 맞았다거나 내가 모자란 사람이니 맞을 만하다고 인식하게 됨으로써 스키마가 형성되는 것이다. 폭력에 순응하고 이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지는 스키마가 만들어진다.

 

사진_픽사베이
사진_픽사베이

 

다행히 아이가 구출되거나 학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되면 어떤 조치를 해야 할까?

정인이처럼 심각한 학대에 시달렸을 경우, 아무리 후속 조치를 잘하더라도 트라우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필요하면서도 근본적인 치유는 이 같은 치명적 기억을 잊어버릴 정도로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을 많이 갖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안전하고 평화롭고 건강하고 행복이 넘치는 그런 가족 공동체 안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행복감을 맛보는 게 중요하다.

‘나는 지금 안전하고 평화롭고 건강한 가정에서 보호받으면서 잘 지내고 있어.’

아이가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더라도,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더라도 절대 폭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체험해야 한다. 내가 엄마를 향해 싫다고 거부해도, 엄마의 말을 듣지 못해 다른 짓을 해도 결코 폭력적인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엄마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세상에는 예전처럼 나쁜 것들도 있지만, 지금처럼 좋은 것들도 많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경험들이 계속 쌓여서 예전에 형성된 트라우마와 스키마를 극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치료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학적 치료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경험으로 인한 인식의 변화가 제일 좋은 치료다.

 

부모들 중에는 의외로 아이의 발달 상황과 연령에 따른 욕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이 대개 자녀에게 폭력적이다. 폭력은 훈육이 아니다. 아직도 사랑의 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 폭력은 사랑이 아니며 올바른 훈육의 방법도 아니다. 자신의 행위가 아동 학대 범위에 들어가는지 모르는 경우도 흔하다. 매를 들고 체벌을 가해야만 폭력이 아니다. 아이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거친 말을 하는 것, 아이에게 윽박지르며 무서운 표정을 짓는 것 이 모두가 폭력이다.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나 역시도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었다. 폭력의 개념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전 세대의 가족 정서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예전의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무섭게 보이고, 근엄하게 보이고, 퉁명스럽게 대하는 게 가장의 권위를 높이고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제대로 된 부모가 되려면 아이의 발달과 심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좋은 부모는 노력 없이 되는 게 아니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프란시스코 페레의 평전 제목이다. 스페인의 교육자였던 페레는 모던 스쿨을 설립해 자유교육을 실천했다. 권위에 의한 어떠한 억압도 아이들에게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를 위험한 교육자로 여긴 스페인 정부는 그에게 정치적 누명을 씌워 형장의 이슬이 되게 했다. 권위와 억압의 대표적 행태는 폭력이다. 상벌을 폐지하는 등 모든 권위와 억압을 거부하고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실현하려던 그는 가장 폭력적인 방법에 의해 세상과 이별해야 했다. 책의 제목은 그의 교육철학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은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아이는 피지 않은 꽃이다. 어떤 꽃이 필지는 주변 환경, 즉 어른들에 의해 결정된다. 폭력은 찬란하게 피어날 꽃의 모든 가능성을 무참하게 짓밟는 악마의 몸짓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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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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