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정정엽 전문의] 

 

1.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 출신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 씨가 최근 일본에서 정자은행에 보관돼 있던 이름 모를 한 남성의 정자를 기증받아 아들을 출산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다. 자발적으로 비혼모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지난달 초 3.2kg의 건강한 남자아이를 출산한 그녀는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당하게 비혼모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갈 것을 선언했다.

“아기를 낳길 원했지만, 출산만을 위해 급하게 결혼할 사람을 찾거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기도 싫었기에 고심 끝에 결혼하지 않고 엄마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소식을 접한 많은 네티즌이 그녀의 SNS에 글을 올려 순산을 축하하는 한편 쉽지 않은 결심을 한 용기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반응은 대단히 긍정적이다.

 

2.

사유리 씨에게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은 좀 복잡할 것 같다. 자신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을 과감하게 선택한 데 대한 부러움도 있을 것이고, 일본이 아닌 한국이라면 넘어야 할 산이 워낙 많기 때문에 너무 다른 양국의 환경을 비교하며 허탈감도 느낄 것이다. 수많은 법적 ‧ 의학적 장벽을 넘는다 해도 문화적 ‧ 규범적 장벽을 넘는 게 결코 만만치 않다.

생명체인 배아를 도구화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여성과 아이의 인권을 파괴한다는 윤리적 비판과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결혼과 가정의 가치를 변질시킨다는 종교적 비판까지 뒤따른다. 배아 세포의 상업화나 대리모 문제 등이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고, 비혼모나 비혼부의 자녀에 대한 유산 상속과 재산 분배로 법적 다툼이 벌어질 염려도 있으며, 유전자 조작을 통해 더 좋은 형질의 아이를 가지려는 비혼 남녀가 생길 거라는 걱정도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조류는 이미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또한 상당하다. 급격히 낮아지고 있는 혼인율과 출산율은 국가적 위기 수준이다. 기존의 결혼과 출산으로 이루어진 전통적 가족 개념으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918명으로 프랑스 1.85명, 미국 1.78명, 영국 1.75명에 비해 현저히 낮다. 합계출산율이란 한 여자가 가임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말한다. 이는 세계 최저 수준이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출산율이 더 떨어져 올 상반기 합계출산율은 0.84명을 기록했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인구 감소 차원을 넘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울 지경이다.

 

사진_픽사베이
사진_픽사베이

 

4.

정신의학적 측면에서는 어떨까? 자발적 비혼모와 비혼부의 경우, 자녀의 성장 과정에서 육아와 교육 문제 등으로 인해 벌어질 번민과 갈등은 없을까? 비혼모와 비혼부의 자녀가 되어 살아갈 아이의 경우,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정체성으로 인한 정서적 혼란은 없을까?

예전에는 아이를 낳아 기를 때 반드시 친엄마가 키워야만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으로도 활발하게 자라 제대로 기능하는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불가피한 사정이 있을 경우, 엄마 대신 혈연관계에 있는 할머니가 양육하는 게 다른 사람보다는 낫다는 통념이 있었다. 친엄마가 양육한 아이와 유모 등 타인이 양육한 아이는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서 아이의 주 양육자가 반드시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아이와의 친밀감이 괜찮으면 아이는 문제없이 양호한 정서를 가진 건강한 아이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양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무난하게 잘 성장하고, 편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는 뭔가 문제 있는 아이로 성장할 거라는 것 역시 우리가 가진 잘못된 선입견일 수 있다. 사유리 씨의 경우도 아이가 어떤 아이로 성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유리 씨의 노력과 아이의 소양이 융합되어 아이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 주변을 보면 누가 봐도 훌륭하고 번듯한 부모가 있는 가정임에도 그 집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일탈행동을 하며 말썽꾸러기로 자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편부모의 보살핌 속에 어렵사리 살던 아이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써서 모두가 부러워하고 칭찬하는 어른으로 자라는 경우가 있다. 부모가 누구고, 집안 형편이 어떻고 하는 것이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툼과 갈등이 계속되는 친부모에게서 자라난 아이보다 배려와 존중이 넘쳐나는 편부모에게서 자라난 아이가 나중에 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문화인류학적으로도 전 세계 많은 민족과 부족 가운데 부모 한 사람만 육아와 교육을 전담하면서도 얼마든지 번영을 누린 사례가 많다.

 

5.

정자를 기증받아 태어난 아이에게는 어떤 일이 있을까? 인간이 맨 처음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하게 되는 것은 상대방의 반응 혹은 상대방과의 비교를 통해서다. 사유리 씨 아들의 경우, 이 정도로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만큼 아이가 자라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저 애가 사유리 씨 아이지?”, “맞아, 사유리 씨 아이잖아?” 이런 반응을 접할 수 있다. 아이 스스로도 다른 아이들이 느끼는 반응과 다르다는 걸 인식하게 된다. ‘왜 나는 엄마만 있는 거지?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문제다. 보통 소수자들은 피해의식이 있다. 이것이 안 좋은 방향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있다. 비혼모나 비혼부는 이런 가능성을 모두 인지하고 나서 아이를 낳는 게 좋다. 아이가 자라면서 이런 생각과 감정이 내면에 거듭 쌓이게 되면 성인이 돼서도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6.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사회심리학 객원 교수를 역임한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은 『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원제: Was kommt nach der Familie?)』라는 책에서 말한다.

“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느냐 물으면 바로 다양한 가족이라 답할 것이다. 이들은 의존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협력하는 존재다.”

가족의 개념이 변하고 있다. 다양한 가족이 등장하고 있다. 어떤 게 정상 가족이고 어떤 게 비정상 가족인지도 점점 모호해진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인류가 종족을 보존하려면, 국가가 체제를 존속하려면, 가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이 유지되는 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성원 간의 인정과 존중과 협력, 사랑과 배려와 희생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앞으로 찾아올 수많은 다양한 가족들을 위해서는 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 없는 따뜻한 시선이다. 그것만으로도 다양한 가족들이 모인 사회 역시 온전히 유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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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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