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한 마을에 효자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모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다. 효자는 용하다는 의원들을 찾아가 치료를 받았으나 모두 차도가 없었다. 이에 상심한 효자는 울다 지쳐 잠들었고 꿈을 꾸었는데, 뒷산 큰 바위 아래서 동자승이 자신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효자가 기억을 더듬어 그 큰 바위 아래로 달려가 보니 처음 보는 약초가 있었고, 그 약초를 가져와 정성껏 달여 노모에게 먹이니 노모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본 내용의 전래동화이다. 모두가 잘 알듯이 간절히 원하는 자의 진심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그 사람을 도와준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하지만, 이 동화의 결론을 극단적으로 바꾼다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만약 약초를 가져와 정성껏 달여 노모에게 먹였는데, 약을 견디지 못한 노모가 죽는다면, 이 동화 속 어떤 인물에게 그 책임이 있을까?

 

먼저, 병을 앓게 된 노모부터 살펴보자. 특별한 병이 아니고서야 병에 걸린 사람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 병에 걸리는 일은 거의 없고, 또 병을 앓는 중에 경황이 없어 어떤 치료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치료를 받다가 사망하였으니 노모 스스로에게 그 책임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은 의원들에 대해 고민을 해 보자. 나라가 정한 시험을 통과해서 의원이 되었기에, 그들은 아픈 노모를 치료할 자격은 있다. 그들의 치료는 모두 차도가 없었지만, 의원도 사람이기에 그들의 치료에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하기에 이를 문제 삼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한 사망의 원인이 되는 약초와 의원들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들 역시 노모의 사망에는 책임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효자를 살펴보자. 효자는 노모가 최선의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 의원들을 찾아갔다. 차도가 없자 절망했고, 우연히 알게 된 정보로 노모를 위해 약을 달여 먹였다. 의원들의 치료는 차도가 없기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던 것 뿐이다. 하지만 그 정보가 정확하지 않았고, 그 결과 노모가 죽게되었다. 노모를 죽일 의도가 없이, 단지 노모의 완쾌를 위해 나름 노력했을 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효자에게 뭔가 잘못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사진 픽사베이

 

어느 날 아이가 아팠고, 나는 병원에 아이를 데려갔다. 의사는 아이를 어떤 병으로 진단했고 약을 처방했다. 아이의 증세는 차도가 없었지만, 의사들은 이 상태가 최선이라고 한다. 이대로 무기력하게 내 아이가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의사들이 말하는 최선인걸까. 나는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동화에서는 효자는 단 한 번의 꿈에서 한 번의 정보를 얻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터넷에서, 텔레비전에서, 이웃에게서, 그리고 가족에게서 수 없이 많은 정보들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아이가 좋아질지 모른다는 기대감, 정보를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 혹은 압박감, 그리고 의사가 처방해 준 것만을 충실히 따를 때 느껴지는 무기력감으로부터의 도피 등을 위해 우리는 그 정보를 따르게 된다. 즉, 우리 모두가 머리로는 의심을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감정들이 나의 간절함과 합쳐져 머리가 하는 올바른 의심을 억누르게 되는 것이다.

 

거짓 정보는 늘 우리 곁에 있으며 그 정보를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또한 부모가 정확한 의학 지식이 없는 것 역시 당연하다. 배운 적도 없고, 쉽게 배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의학지식이 없는 부모가 거짓 정보를 구별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거짓 정보를 구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아동에게 적절한 의료를 제공하지 못할 가능성은 모든 부모에게 있지 않은가.

 

사실 부모로서 거짓 정보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정확한 방법은 의사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잘 아는 이유로 의사에게 물어보기를 꺼려한다. "의사에게 물어보면 화를 내요" 혹은 “의사는 늘 안 된다고 해요” 사실, 의사도 약간은 화가 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국물요리를 맛있게 하기 위해서 자녀에게 멸치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다시다를 사온다면 누구든 약간은 화가 나지 않겠는가.

의사가 안 된다고 하는 이유는,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호자가 환자를 위해 찾아온 방법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즉 보호자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 자체가 환자에게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픽사베이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의사가 화를 내든 말을 차갑게 하든 간에, 그 조언은 분명히 아픈 자녀에게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의사의 태도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 역시 분명하다. 왜냐하면 부모 자신의 노력이 권위자에게 부정당했고, 자녀에게 해가 될 뻔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자녀가 아픈 중에 부모는 흔히 자책을 하게 되는데, 이런 일이 더해진다면 부모의 마음에 병이 들기 쉽게 된다. 마음이 병든 부모는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신에게 아픔을 주는 의사도 멀리하며 결국 이는 아픈 자녀에게 악영향을 주게 된다.

 

이런 보호자의 고통에 대해서, 치매나 암 같은 만성질환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를 대상으로는 잘 연구되어 있다. 또한 그런 위중한 병은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는 경우가 많기에, 필요할 경우 의료진이 보호자에게 의학적 교육과 정신과적 면담을 하기에도 수월하다.

하지만 아토피 같은 아동의 만성질환은 주로 외래 통원치료 위주이기에 보호자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며, 보호자의 고통에 대한 대처도 쉽지 않다. 이런 질환의 보호자들은 의학적 관심과 정신적 지지의 사각지대에 빠지게 되며,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안아키'-자연치유 육아법을 표방하였으나 이를 학대의 수준으로 방관해 논란이 된 인터넷 카페-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사진 픽사베이

 

최근 정부에서도 보호자의 정신건강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며, 말기암 환자가 사망한 경우 환자 보호자에게 사별가족관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보호자의 정신건강에 대한 정부의 정책이 확대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호자 스스로도 자신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역시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보호자의 마음이 건강해야, 환자를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병은 몸에 병이 생긴 것과 같이,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몸의 병과는 또 달리, 약물 없이 간단한 면담만으로 그 병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아픈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는, 또 가족을 돌보는 와중에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마음, 올바른 판단력 등 자신을 챙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나의 건강과 가족의 건강을 같이 챙기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쉽지 않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 땅의 모든 환자 보호자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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