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선릉 연세 채움 정신과, 윤혜진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20대 중반 여성입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겪은 우울감이 청소년기를 지나 20대 초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무기력하고 충동적이었고 대인관계가 어려워서 자기비하를 일삼았습니다. 다행히 성인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자기 계발을 하면서 대인관계가 아직 어렵긴 하지만 괴롭다는 생각은 줄어들었고 취직을 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그러나 우울했던 기억과 경험들이 아직 저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 하나가 자기비하와 자책입니다. 저 스스로 잘못한 모습이 보이거나 기대에 미치지 않으면 속으로 제 욕을 엄청 많이 합니다. 사회 초년생일 때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자신에게 '이것도 모르는 나는 멍청이야'라는 생각도 들어 스스로 자책을 깊이 했습니다. 업무에 익숙해지고, 스펙을 더 쌓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열심히 경력을 쌓았는데요. 저 자신에게 엄격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멍청이라고 생각하니 다른 사람에게도 내가 멍청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아 두렵고, 어떨 땐 작은 농담에도 자신을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청소년기 우울했던 모습보다 지금 일도 하고, 대인관계도 나쁘지 않은 지금 모습이 싫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의 분노나 자기비하가 지나가고 나면 우울함밖에 남지 않습니다. 경제활동이 되니까 돈을 생각 없이 막 쓴다든지, 음식을 배가 터질 듯이 먹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저의 공허함을 채우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책에서는 많이들 나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저의 이런 점들이 너무 두렵습니다....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윤혜진입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우울감이 있으셨군요. 오랜 시간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시간들을 꿋꿋이 버텨내고 지금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전보다 나은 상태로 지내시는 점에 대해 많은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고 대견하다, 장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어린 시절부터 우울감이 있었던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을 거예요. 유전적, 생물학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고 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형제자매나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그동안 겪었던 트라우마, 소중한 대상을 상실했던 경험 등도 궁금하네요.

특히 자기 비하와 자책을 많이 한다고 하셨는데요.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책망을 들었던 트라우마의 재경험일 수도 있고, 누군가 나를 꾸짖거나 처벌하기 전에 미리 스스로 행함으로써 다가올지도 모를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경감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도 있겠어요.

또 한 가지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여 더 빨리 달리게 하듯이 나를 스스로 채찍질하는 것이 내가 더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하게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실제로 자책이 어느 정도는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해요.

 

하지만 계속 채찍질만 하다보면 말이 지치게 되지요. 분노나 자기비하가 지나가고 나면 우울감이 심해진다는 건 그런 뜻일 거예요. 말에게 당근이 필요한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글쓴분은 스스로에게 주는 당근으로 쇼핑이나 음식 등으로 마음을 채우게 되는 것이랍니다.

당근도 채찍질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만, 과한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뜻은 무조건 나에게 칭찬과 격려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필요하고 건강한 만큼의 당근을 먹고 적당한 채찍질을 가한다는 이야기일 거예요. 지금은 자책과 자기비하가 너무 과하신 편이니까 줄일 필요가 있겠지요. 그걸 줄이신다면 쓸데없는 쇼핑이나 폭식도 줄어들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전보다 우울감이 나아지셨다고는 하셨지만, 현재 상태가 어떤지 정확한 평가가 필요할 것 같아요. 자책과 자기 비하가 아직 남아 있는 우울감으로 인한 결과인지 혹은 성격적이나 습관적으로 굳어진 문제인 것인지 알아보고 줄이는 것에 대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신다면 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랍니다.

당장은 실수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자책을 하게 되더라도, 그럴 수도 있지, 이만하면 그럭저럭 잘하고 있어, 느리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라고 스스로 토닥여주시는 시간이 더 늘어나시길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