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 심리학도가 실험을 준비했다. 피험자들에게 농구 장면을 보여주며 패스가 몇 번을 오고 갔는지를 세어 보라 요구한다. 장면이 끝나고 참가자들은 의기양양하게 오고 간 패스 횟수를 보고한다. 실험자가 다시 주문한다. “한 번 더 영상을 보시되, 이번에는 패스 횟수는 신경 쓰지 마세요.” 같은 영상이 다시 재생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험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농구 코트 한가운데 커다란 고릴라(분장을 한 사람)가 활개를 치고 있는데도, 이를 첫 재생 때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고나 유머 소재로도 활용되어 유명한 다니엘 사이먼스의 ‘지속적 부주의에 의한 맹목 (sustained inattentional blindness)' 실험이다.
 

사진_픽사베이


지금 눈을 감고 생각을 멈춘 채 주변에 들리는 소리 다섯 가지만 찾아내 보자. 컴퓨터가 돌아가는 소리,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기침과 발자국 소리, 온풍기의 바람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 적막하다고 생각했던 주변이 오히려 온갖 소리가, 그것도 꽤나 큰 볼륨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집중하면 이렇게 잘 들리는 소리들을 어떻게 우리는 마치 없는 것처럼 느낄까. 그것은 뇌가 자극을 선택적으로 거르기 때문이다.

보고 듣는 것, 즉 오감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여 이해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심리적으로도 그렇겠지만 생리적으로도 그렇다. 뇌는 활동의 에너지원으로 양질의 포도당만을 소비한다. 불필요한 자극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유기체의 입장에서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다. 또한 주어지는 감각 정보들을 모두 처리하여 인식하기엔 뇌의 정보 처리능력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 시시각각 오감을 자극하며 쏟아지는 세상의 감각들은 그야말로 무한대다. 그에 일일이 반응하다간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뇌는 자극을 적절히 여과하여 선택적으로 반응한다. 아무리 고릴라가 영상 한가운데서 날뛰어도, 몇 번의 패스가 오고 가는지에 집중하는 뇌는 공의 움직임만을 주시한다. 여러 조건을 반영하여 덜 중요한 자료를 거르고 원하는 정보만을 화면에 띄워주는, 포털 사이트의 검색 필터링과 같은 작업이 뇌에서도 일어난다. 뇌는 (스스로 인식하기에) 중요한 자극, 즉 현저성(salience)을 띄는 자극에 집중할 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자극에 대한 인식은 약화시킨다. 그 덕으로 인간은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지금 당면한 과제에 집중할 수 있다. 현저하지 않은 자극에 대한 부주의(inattention)는 맹목(blindness), 달리 말해 망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유용한 기전이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기도 한다. 어째서일까. 아쉽게도 이러한 뇌의 여과기능이 추구하는 것은 효율이지,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도의 쾌락이 아니라면, 행복을 주는 자극들은 대체로 무해하고 유순하여 현저성을 띠지 않는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은 상쾌함을 주지만 출근에 바쁜 우리의 관심을 끌 정도로 충분히 자극적이진 않다. 재밌었던 농담, 예기치 않게 만족스러웠던 점심메뉴, 새로운 취미 상상 같은 생각들도 마찬가지다. 회의 준비, 당장 해결해야 할 업무상 문제, 불편한 사람과의 관계 같은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뇌는 행복하고 밋밋한 자극들을 무자비하게 걸러내 버린다.

뇌가 추구하는 효율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다. 현대적인 관점으로 바꾸어 말하면 돈, 권력, 대인관계, 이성관계다. 단순히 개체에 안식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자극은 대개 뇌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뇌는 끊임없이 돈, 힘, 인기와 명예를 갈구하고, 이와 연관된 자극에 집중한다. 순진한 인간은 당면한 과제의 해결이 행복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지만, 뇌는 그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한다. 원하던 돈을 벌고 명예를 얻은 뇌는 잠깐의 안도를 제공한 후 이내 더 큰 목표를 향해 우리를 내몬다.

티브이나 유명 포털 메인의 뉴스들이 그곳에 걸리는 이유는 널리 읽히기 때문이다. 즉 뇌의 시선을 끄는 내용들이다. 파국으로 치닫는 국제 정세, 권력을 이용해 서슴없이 남을 울리는 사람들, 잔혹한 범죄, 돈 없고 힘없는 억울함 ... 두렵고 불안하며 울적한 일일 수록 뇌의 시선을 채간다. 뇌의 시선을 따라서만 세상을 읽다 보면 삶은 속 터지는 일의 연속만 같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에 속 터지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드는 글의 문구, 떠올릴 때마다 뭉클한 영화의 장면, 그를 처음 만난 카페의 테이블, 살아가다 보면 마음이 쉬는 순간들과 마주치기 마련이다. 문제는 우리의 뇌가 당면한 고난에 집중하느라 자그마한 소중함들은 우습게 까먹는 데 있다. 행복할만한 일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다. 소소한 행복들이 고릴라처럼 우리의 삶을 곳곳을 뛰어다녀도, 패스를 세듯 살아갈 걱정만 세느라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사진_픽사베이


스스로를 매일매일 슬픔과 불안의 늪으로 밀어 넣는 뇌가 야속하기도 하다. 하지만 뇌가 행복한 영화 대신 두렵고 울적한 영화만을 틀어주는 것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다. 심장이 1분에 80번씩이나 뛰며 개체의 생존을 위해 매진하듯, 뇌도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자극적인 삶의 고통들이 더 중요한 것이라 간주하고, 스스로의 역량을 이들을 처리하는 데 온전히 집중할 뿐이다.

 

그렇다면 살아남는 것 못지않게 행복을 중요히 여기고, 이를 넘어 사는 이유를 행복에서 찾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불행함이 삶의 전부처럼 여겨질 때, ‘안 좋은 일만 있어서가 아니라, 힘들어서 뇌가 안 좋은 일에 집중하고 있구나.’ 떠올려보면 어떨까. 그리고 예기치 않은 작은 행복이 찾아왔을 때, 이내 잊어버리기 전에 이를 잘 기억해두면 어떨까.

출근길 문득 쳐다본 하늘이 아름다웠다면, 일부러 집과 회사를 나설 때 하늘을 쳐다보는 것, 가슴을 두드린 문구를 카톡에 적어두고 틈날 때 들여다보며 미소 짓는 것,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레시피를 잘 간직했다가 한 번쯤 시도해 보는 것, 뇌가 스스로 안도하고 행복하길 바랄 수 없다면, 내가 나서서 스스로의 뇌에게 행복을 알려주는 것이다. 뇌가 불행하다고 인식하기에 무작정 불행하기보단, 때로 울적하고 슬퍼도 그래도 이렇게 살만한 순간들도 있다고, 친한 친구를 보듬듯 뇌와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는 것이다.

 

‘지속적 부주의에 의한 맹목’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맹목을 만드는 것은 지속적 부주의다. 농구코트를 활개 치는 고릴라조차 보이지 않게 할 만큼 강력한 것이 부주의다. 삶이 불행의 연속 같다면, 혹시 패스를 세듯 불행을 세는 데 집중하는 중은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보면 어떨까. 차분히 삶을 돌아보다 보면, 비로소 고릴라가 보이듯, 바라봐주기만을 소심하게 기다리던 소중한 행복들이 보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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