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고민 끝에 질문을 올려봅니다. 저는 30대 직장인 여성입니다. 전 어린 시절부터 예민하고 겁이 많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어요. 남들은 귀여워하는 강아지도 길 가다 마주치면 주저앉아 울음부터 터뜨렸거든요.

친구들 사이가 소원해지면 저 혼자 긴장해서 잠을 못 자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를 슬쩍 보기만 해도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오늘 옷이 영 이상한가 하는 생각에 전신 거울에 저를 비춰보곤 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길 가다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걸음이 빨라져요. 한 번은 112에 신고한 적도 있었어요. 물론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지요. 친구들은 극성이라고, 그럴 필요가 있냐며 핀잔만 주곤 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저는 죽을 맛이거든요. 세상 모든 것이 걱정되고 두려워요. 

여행을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화장실입니다. 깨끗한 화장실을 찾지 못하면 정말 끔찍한 여행이 되어버립니다. 굳이 깨끗한 곳을 찾을 때까지 꾹꾹 참다 방광염에 걸린 적도 있어요. 요즘처럼 뉴스에 무서운 기사가 많이 오르내리면, TV를 잘 보지 않거나 금세 돌려버립니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기사에 열광하던데, 저는 사람들이 그런 기사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편해져 자리를 피하기도 하고요. 

그러니 직장생활도 편할 리가 있나요. 상사가 꾸지람을 하면 별 이야기 아닌데도 눈물이 핑 돌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그러고 나면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다는 느낌에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어요. 언젠가부터 저한테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소위 ‘은따’가 된 것만 같아요. 힘들게 들어간 직장인데 견디기가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네요. 

저는 대체 왜 이런 걸까요? 저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괴롭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변화를 위해선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요. 제발 좀 알려주세요. 남은 삶을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 생각하니 너무 끔찍합니다.
 

사진_픽셀

 

답변)

뉴스의 무서운 기사를 회피하고, 모르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긴장되고,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이 모든 양상을 정신의학 용어로 요약하면 '불안 수준이 높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의 생김새가 저마다 다양하듯이 사람들 각자의 내면 또한 그 모습이 천차만별이지요. 어떤 이들은 63 빌딩 정상에 올라가 아래를 쳐다보아도 눈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질문자님처럼 약간의 긴장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고, 온몸이 경직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저마다 내재된 불안의 수위는 조금씩 다른 셈입니다.

이런 예민함을 단순히 '타고났다'는 말로 재단하기엔 인간의 성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이를 좀 더 단순화하자면 인간의 성격은 크게 1) 유전적 기질 2) 성장 과정의 경험 3) 결정적인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의 복합적 상호작용으로 생겨난다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유전적 기질이라 함은, 유전적으로 쉽게 불안해질 수 있는 기능 수준을 타고난 겁니다. 가족들 중 불안과 관련된 정신 질환을 가진 이들이 있거나, 출생 과정에서의 뇌 손상 등으로 인해 생물학적 결함을 타고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불안장애를 앓거나, 혹은 불안장애에 준하는 증상들을 삶에서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좀 더 높습니다.

또 하나는 성장 과정의 경험입니다. 건강한 유전자를 타고났더라도 늘 긴장하고 살아야 하는 환경에서 성장하거나 학창 시절 따돌림의 경험, 혹은 크나큰 좌절을 연거푸 경험했다면 이 또한 예민하고 불안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긴 기간의 부정적 경험 말고도 단기간의 강렬한 부정적 경험(트라우마) 또한 위와 같은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잔잔한 물결만 일렁이는 호수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다면 물결이 걷잡을 수 없이 세지고, 호수의 수위 또한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물론, 위의 세 항목에는 엄청나게 많은 가지 수의 하부 항목들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또, 개인에 따라 세 가지 중 둘 이상의 다양한 원인의 조합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고요.

 

자신이 왜 예민한 성격인지 묻는 질문에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이를 바꾸어 나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첫 번째 과정이 성격의 뿌리를 살펴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면 위에 있는 문제들을 아무리 바꾸어 나가려 애쓴다 한들, 수면 밑에 더 깊고 큰 문제의 뿌리가 있다면, 이를 파악하지 않고는 변화를 해 나갈 수 없습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며 자기 성격의 뿌리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고, 이를 애도하고 스스로를 위로해 나가는 과정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참 다행인 건 질문자님께서 자신의 삶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인식하고 있고, 또 이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라건대 좀 더 깊이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삶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면 의지는 더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행동의 변화에 다른 왕도는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사고와 행동이 변하는 가장 큰 틀은 1) 자신의 문제를 충분히 알고, 2) 기존과는 다른 방향의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지요. 지난한 과정을 혼자 해나가기 힘들다면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습니다.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멀리서 질문자님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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