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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illee [비회원]
빨간약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해주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일준 선생님과 모든 참여자분들께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제가 빨간약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처음 걱정했던 것은 세가지였습니다.
첫째, 내가 원하는만큼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둘째,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내 비밀 이야기를 어디까지 꺼낼 수 있을지, 그리고 그 후의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셋째, 프로그램이 끝나고 가시적인 효과를 얻지 못했을 때, 스스로 실망하고 낙심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일단 이일준 선생님을 믿고 참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첫 시간에 이일준 선생님은 6주라는 짧은 시간으로 드라마틱하게 우리들의 삶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처음 걱정했던 부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실망스러울지 모를 이 말씀이 오히려 저를 편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신뢰를 주었습니다. 그게 사실이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셨으니까요. 6주 후에 드라마틱하게 변한 삶을 살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가는 방향은 어느정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있고, 해결책도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를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혼자서는 해결하기 힘들었고 실제 생활에 적용해서 해결하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을 함께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혼자서는 가기 힘든 그 길을 함께 갈 용기를 갖게 해준 시간이 이번 6주간의 빨간약 프로그램이었고, 도와주신 분들이 이일준 선생님과 참여자분들이었습니다.
단체로 상담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오랜시간 내가 비밀스럽게 지켜온 이야기들이,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이 부담스럽고 꺼려지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일준 선생님은 철저하게 참여자가 수위와 범위를 결정해 조절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야기를 강요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억지로 이야기하는 참여자도 없었습니다. 참여자 하나하나가 자신의 마음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해주며 남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듣고 공감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장 감격스럽기도 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잘 모르던 사람들과 이런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용기 내서 자신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가슴으로 공감해주는 분들이 눈앞에 함께 있는 광경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신기한 점은 나만 갖고 있고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의외로 다른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가슴에 숨겨두고 떠올리면서 고통 받았던 아픈 일들이 사실은, 남들도 비슷하게 겪고 있던 일이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습니다. 그래서 더 공감할 수 있었고,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프로그램 회차가 지날수록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게 되고, 더 깊은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하고 들어줬습니다. 스스로 자기 이야기들을 꺼내고 들어줬습니다. 6주라는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6주 동안, 빨간약 프로그램은 자유연상을 중심으로 이어갔습니다. 자유롭게 연상하고 글을 써가는 동안 중요한 지점들이 보였고, 그 지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문제들을 꺼내 직시하는 것은 아주 힘든일입니다. 때문에 전이와 저항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저는 제 자아와 분리되어 있어서 그런지 심각한 저항이나 불편한 점은 잘 느끼지 못했습니다. 내가 내 일에 대해, 내가 겪은 상황과 일들에 대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슬퍼하지 못하는 모습이 시사하는 점 또한 크고 중요하다는 이일준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저는 제가 겪은 일들이 그리 큰 상처가 아니라서 어른이 된 지금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들이 사실 제가 저를 부인하고 외면한 채 살아왔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말씀에 살짝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연민의 감정이나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담담하다는 것이, 그저 ‘내가 어른스러워서 그런거야’ 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으니까요. 바로 지금 이 지점이 바로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제 단절되었던 나와의 대화를 시작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크고 작은 상처들을 입었을 때 충분히 느껴주지 못하고 달래주지 못하고 억누르고 숨기기만 했던 진짜 나의 마음들을 다시 꺼내 충분히 느껴주고 충분히 슬퍼해줄 것입니다.
빨간약 프로그램을 통해 가시적인 효과를 보신 분들도 있고, 아직 미미한 분들도 있겠지요.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그리고 치유에 소요되는 시간도 다 다르겠지요. 그래도 대부분 방향성에 대한 해답은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내 문제를 풀어나갈 방향을 잡은 것도,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용기를 가진 것도 빨간약 프로그램 덕분입니다. 오랜 시간 힘들었던 내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해줄 선명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제부터 천천히 진짜 나를 만나 안아주고 또 안아주는 감격의 시간이 오기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