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제목

용서는 회복을 낳고_7화 부산 스파르타 기숙학원

닉네임
옥탑방 글쟁이 [회원]
등록일
2018-01-01 15:09:01
조회수
728

일곱번째 이야기. 부산 스파르타 기숙학원

 

 

  철저히 나만을 위해 살아온 학창시절에는 주위에 친구가 생겨날 수 없었다. 늘 혼자 밥을 먹고 늘 혼자 집에 가는 시간이 많았다. 원망과 분노로 날카롭게 살았기에 누구도 다가 올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처음으로 이해해주고 포용해 준 건 멀리 부산의 친구들이었다. 말투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나를 그들은 친구로 받아 줬다. 늘 암울하게만 느껴졌던 나의 재수생 생활에 부산의 추억은 따뜻하게 남아 있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 원서접수를 위해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이 이어졌다. 내 차례가 되어 원망을 가득 안고 교무실에 갔다. 선생님은 2003 수능 대학배치표의 뒷면을 펼쳤다. 앞면은 서울과 수도권 대학, 뒷면은 지방대와 전문대 지원용이었다. 뒷면을 살펴보던 선생님께 혹시 재수를 하면 어떨지 물었다. 당연히 성적이 터무니없이 낮았기에 선생님도 응원해주실 줄 알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너는 재수를 하다가 더 박살 날 수도 있어.”

 

  선생님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된 게 선생님과 부모님 때문이라 생각하니 화가 났다. 선생님은 마음 속 깊은 불을 끄라는 말과 함께 돌려보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이 맞았다. 그분의 표현대로 난 이미 몸과 마음이 박살난 상태였다.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결국 지방대 몇 군데에 원서를 넣었지만 모두 떨어졌다. 과거에는 이름도 몰랐던 대학들이였다. 이후 난 더욱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대학을 목표로 했는데 이제는 지방대도 들어 갈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그나마 친했던 학교 친구들과 모든 연락을 끊었다. 당시 내겐 핸드폰도 없었고 집전화도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철저히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모든 대학에서 떨어지고 난 뒤 할 수 있는 일은 원하건 원치 않건 재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예전에 가고자 했던 부산의 스파르타 기숙학원이 떠올랐다. 새로운 마음과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어머니도 이번엔 반대하지 않았다. 그동안 기숙학원을 반대했던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선생님 말대로 학원에 보내지 않은 걸 후회하고 계셨다. 그렇게 난 부산행 기차를 탔다. 서울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첫 타지 생활에 대한 약간의 설렘도 있었다. 재수를 한 것에 대한 실망이 컸지만 다시 성적이 오를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렇게 기차 안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부산 서면에 있는 기숙학원에 도착했다. 사감 형과 누나들이 짐을 맡아 줬다. 입학생들은 쉴 틈도 없이 바로 교실에 들어갔다. 첫날이니 오리엔테이션이나 입학 행사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공부였다. 다들 멀리서 오느라 피곤하고 긴장되었을 텐데.. 우리 모두 군말 없이 교실에서 공부했다. 물론 제대로 집중 할 수는 없었다. 수능을 실패하고 낯선 환경에 들어왔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숙소에 갈 수 있었다. 큰 방 하나에 2층 침대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그 방에 30여명의 재수생들이 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 7시에 교실로 향했다. 그 전에 공용 화장실이나 대형 욕실에서 씻고 가방을 챙겨야 했다. 조금이라도 숙소에서 늦게 나오면 “일어나! 이 게으름 뱅이들아~!”라는 수위 아저씨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그리곤 숙소의 문은 잠겨 졌다. 숙소는 잠만 자는 곳일 뿐 하루 종일 교실에 있어야 했다. 사감 형, 누나들은 24시간 우리를 보살피고 통제 할 의무가 있었다. 나이는 5살 정도 더 많은 대학 휴학생들이었다. 그들도 이곳 기숙학원 출신으로 모두가 서울대 혹은 의예 학과에 합격한 전설들이었다. 밤마다 사감 형들의 공부 비법과 생활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잠들었다.

 

  학원 재수생 모두가 부산과 통영, 남해, 울산 등 경상도 출신이었다. 서울에서 온 건 내가 유일했다. 그래서 다들 내게 호기심을 갖고 관심을 주었다. 당시 KTX가 활성화 되지 않았고 우리 나이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살이었다. 나도 부산에 처음 왔지만 그들도 서울 사람을 처음 본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서울을 동경하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서울에 정착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었다. 자연스레 나는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내게 서울에 대해 묻기도 하고 서울말을 알려 달라 하기도 했다.

 

  물론 기숙학원 생활은 힘들었다. 수능 실패 뒤 학원 건물에 갇혀 지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스트레스였다. 학원 건물 앞마당까지만 우리의 활동구역이었다. 정문을 열고 나가거나 울타리를 넘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창밖을 바라보며 길거리를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이성문제도 간과할 수 없었다. 스무 살의 남녀들이 하루 종일 교실에서 함께 지내다보니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하지만 몰래 연애하다 걸리면 학원에서 쫓겨났다. 다들 자유와 감정을 억누르고 공부만 해야 했다.

 

  그나마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운동이었다. 하지만 난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당시 키 178에 몸무게 60킬로의 빼빼마른 내가 재수를 하며 정상체중이 되었던 이유다. 한 달에 1박 2일, 혹은 두 달에 2박 3일로 잠시 집에 다녀올 수 있는 단체 휴가가 주어졌다. 서울에서 온 나는 휴가 기간이 길면 집에 다녀왔지만 1박 2일처럼 짧으면 부산 안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학원에는 이모가 부산에 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홀로 부산의 해운대나 광안리, 서면 번화가를 돌아 다녔다. 그러다 치킨이나 간식을 사들고 혼자 모텔에 가서 잠을 자고 다음날 학원으로 복귀했다. 그래도 스트레스는 계속 쌓였다. 여러 마음을 억누르다 보니 학원생활이 점점 힘들어 졌다. 이를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과거 상처를 줬던 아이들과 선생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공부 할 때마다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 뽑는 습관이 생겼다. 다른 학생들은 머리를 뽑지 말라고 걱정 해줬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계속 머리를 쥐어 뽑고 있었다. 가끔은 밤마다 악몽으로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기도 했다. 같은 방아이들이 자다가 놀랄 정도였다. 증상이 심해져 공부를 하다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행히 부산의 아이들은 나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따돌리지 않고 위로해 주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환경에 있었지만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재수학원에 온 지 5개월이 지나 내 머릿속은 더 황폐화 되었다. 재수를 하는 내 모습에 자존감이 낮아졌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날 비웃는 것 같았다. 어떤 소리가 들리면 나를 욕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학원 아이들이 나를 왕따 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원 아이들 누구하고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저 공부만 하려 했다. 아이들은 걱정하며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자율 학습 시간이었다. 내 뒤쪽에서 누군가 수군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나에 대한 험담으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행동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더욱 화가 나서 책상을 손바닥으로 마구 내려쳤다. 그제서야 반에 적막이 흘렀다. 반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이 나를 데리고 교실을 나갔다. 그리고 학원 교무실로 가서 우리 반 담당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 선생님과 형은 내게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라는 한마디 말을 던졌다.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는 부산을 떠나야함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스트레스가 계속 쌓아서 미쳐 갈 거 같았다. 이런 나로 인해 다른 학생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서울의 집으로 보내달라고 울며 애원했다. 선생님과 형은 나를 위로하고 달랬지만 나는 당장 서울로 보내달라고 사정했다. 선생님은 걱정하며 말했다.

 

“집에 보내주더라도 지금은 너무 늦었는데 어떻게 가겠다는 거니?”라며 걱정되서 지금은 보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날 밤은 혼자 일찍 숙소 방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 자율학습을 마친 아이들이 방에 돌아왔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괜찮은거니?” “무슨 일이 있었느냐?” “혹시 내가 잘못하게 있느냐?”며 걱정하고 위로해줬다. 나는 울면서 “너희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아무도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며 달래 주었다. 그 말을 듣자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더 이상 피해를 주면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다음날 아침, 한 친구에게 내 대신 짐을 모두 싸서 서울로 보내달라고 은밀히 부탁했다. 그 친구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난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뒤로하며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황급히 서울행 기차를 탔다. 아이들은 내가 휴가를 얻어 서울에서 잠시 쉬다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난 사실대로 말하고 작별인사를 나눌 면목이 없었다. 그들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곳을 떠나야 했다. 부산 기숙학원에서 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산의 친구들에게 참 미안하고 고맙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힘든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며 재수생활을 버텼다. 그러나 난 그 친구들을 오해하고 때로는 원망했다. 특히 매우 이기적이고 기이한 행동을 보였던 나를 수용하고 걱정해 준 친구들이었다. 만약 그때로 돌아 갈 수 있다면, 아이들을 서울로 초대하여 경복궁과 남산타워, 롯데월드를 구경 시켜주고 싶다. 휴가 기간 동안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이라 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작성일:2018-01-01 15:09:01 183.96.97.22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게시물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
Ulap Lim 2018-01-21 19:46:27
저는 여학생재수기숙사학원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역시나 억압적인 곳이라 조건이 좋았고 성심성의껏 아이들의 밤을 지켜주고 아침 조회마다 아이들에게 몸체조를 시켜주는 것도 유투브에서 보고 연구하여 눈지압도 알려주던 그 시간들도 너무 달콤하고 좋았지만... 억압적인 곳에서 항상 나타나는 감시당한다는 망상 때문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밤에 잠을 자지 않는 아이들에게 기합을 주라는 지시가 있어서 대안학교에서 배운 몸에 좋은 단전 자세를 가르쳐주며 그 자세로 서 있으라고 하니 아이들은 뭔가가 즐거웠는지 웃었고 저도 속으로 웃으면서 이제 자라고 다독였습니다. 저는 충분히 억압적인 상황에서 재치있게 아이들에게 자유를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은 그걸 못 견디더라고요. 가는 곳마다 짤리거나 혹은 망상 때문에 그만두거나 하는 좌절이 있지만 그 짧은 경험들 때문에 힘들었던 청소년, 글쟁이님에게 이렇게 위로랍시고 이야기를 건네게 되네요.

그만두고 올라온 것은 잘 하신 것 같습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인간다운 분이었다고 스스로를 믿었으면 해요.

과거를 잊기는 힘들도 상처는 더더욱 잊기 힘들지만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우리를 못살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글쟁이님 글을 읽으니 과거가 매우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과거가 다 올라오는 날이면 밤잠을 못 잘 정도로 괴로우니 과거란 우리에게 커다란 감옥은 아닐까요.

저는 감정이입을 잘 하는 편이라 다른 사람의 힘든 이야기를 들으면 며칠 힘든 사람이예요. 그래서 글쟁이 님의 글을 읽는 것이 매번 용기가 필요하네요. 하지만, 읽어야 하고 읽으려고 합니다. 거울을 보면서 혹은 타인의 힘든 이야기를 보면서 뭔가 해야 할 일을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편견타파를 위해 솔직하며 수치심을 이기셨으니 그것에 대해 위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