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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제목

용서는 회복을 낳고_6화 길거리의 낭만고양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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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글쟁이 [회원]
등록일
2018-01-01 11:26:35
조회수
802

여섯번째 이야기. 길거리의 낭만고양이들

 

 

  2017년, 제법 가을바람이 쌀쌀했던 퇴근길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기독교인 모임에서 알게 된 상담 전공 교수님의 전화였다. 의정부 청소년 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 하나를 맡아 달라는 것이다. 작가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살아 온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주저 없이 승낙했다. 어릴 적 부모에게 받은 상처와 왕따 경험이 아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 될 것 같았다. 언론학, 출판학을 전공하고 기자로 일한 경험도 있다. 게다가 사회복지사 자격도 있으니 내 사명이라 생각했다. 나의 짧은 길거리 생활마저도 오늘날을 위해 쓰임에 감사했다.

 

  나의 길거리 생활은 고3 여름방학 때 시작되었다. 성적이 떨어지고 기숙학원도 좌절되었다. 아직 대학에 대한 꿈과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다. 정신을 다잡고자 삭발한 머리 스타일을 유지했다. 오전에 학교 방학 보충 수업이 끝나면 바로 학교 앞 독서실에서 갔다. 독서실이 문을 닫는  밤 12시면 근처에 있는 종로 미 대사관 앞 작은 공원에 갔다. 새벽이라 인적이 뜸했고 늘 2~3명의 노숙자가 벤치 위에서 잠을 자곤 했다. 미 대사관 앞이다 보니 의경들이 밤새 지켜보고 있어서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서실이 끝나고 공원에 오는 이유는 밤새 잠을 자지 않고 가로등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짐은 텔레비전 방송을 보며 생겨났다. 휴먼드라마 같은 프로그램에서 매일 잠을 자지 않고도 지장 없이 일상생활을 하는 대학생이 소개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새벽이면 운동을 하거나 한강 유원지를 달렸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면 다시 공부를 했다. 물론 그 사람은 생리적으로나 신경적으로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분비되어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몸이었다. 방송을 보며 그 대학생 형을 따라하고 싶었다. 호르몬은 생각도 않은 채 강한 정신력과 의지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했다. 떨어진 성적과 가까워지는 수능날로 인해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전에는 학교, 오후에는 독서실, 새벽에는 공원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방학 첫째날 월요일, 공원에서 밤을 새며 새벽은 아주 긴 시간이라고 깨달았다. 공원 주변에 지나가는 차들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모든 상점과 건물들은 문을 닫았다. 그나마 24시간 편의점은 늘 열려 있었다.

 

  방학 둘째날 화요일,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한번에 4개의 캔 커피를 마셨다. 속이 너무 미식거리고 커피를 생각만 해도 토할 지경이었다. 그래서일까? 하루종일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안고팠다. 이후로 허기져도 커피를 더 마셔서 배를 채울 뿐, 졸릴 까봐 음식을 먹지 않았다.

 

  방학 셋째날 수요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졸렸다. 그럴때는 공원에 앉아 있기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가로등 아래서 공부를 하다가 졸리면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다시 공부를 하다가 또 졸리면 이번엔 한 시간 정도 도로를 따라 걷다가 다시 공원으로 돌아와 공부했다. 음악을 들으며 걷다보니 제법 버틸 수 있었다.

 

  방학 넷째날 목요일, 몇 시간이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서울 시내를 돌아 다녔다. 학교가 있는 종로를 벗어나 남산을 지나갔고 한강 대교에 도착했다. 대교를 건넜다가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갔다. 남산을 지나고 종로에 있는 학교 정문에 도착했을 때 새벽 4시 반이었다. 물론 정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었다. 정문 앞에 쭈구리고 앉아 기다리다 보니 6시가 되어 수위 아저씨가 정문을 열어 주셨다.

 

  방학 다섯째날 금요일, 이날도 학교와 독서실 공부를 마치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다시 학교에 도착하여 정문 앞에서 쭈구려 앉아 있었다. 수위 아저씨는 문을 여시며 부지런한 학생이라고 칭찬해주셨다. 복도 끝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양말을 벗어 발을 씻은 뒤 다시 교복과 양말을 입고 보충수업을 들었다.

 

  월요일부터 잠을 한숨도 안자고 방학 여섯째 날인 토요일 새벽이 되었다. 이날도 서울 시내를 걷다가 이른 아침에 종로에 도착했다. 학교를 향해 걷는 데 평소보다 두배의 시간이 걸렸다. 걷다가 졸면서 멈춰 서고, 또 다시 걷다가 졸면서 멈춰 서기를 반복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겨우 학교에 도착했다. 이날은 수업 대신 CA 동아리 활동이 있었다. 나는 영화 감상반이었다. 교실에서 출석 체크를 하고 동아리 반 아이들은 모두 광화문에 있는 영화관에 갔다. 그날 본 영화가 2002년 8월에 개봉한 인썸니아(불면증)라는 영화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알파치노와 로빈 윌리엄스가 나오는 영화였다. 다행히 영화를 보면서 졸지는 않았다. 이대로 영화관에서 잠들면 스스로와의 약속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밖에 나와서 갈 곳이 없었다. 아직 해가 창창한 낮이었지만 토요일은 독서실이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집에 들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월요일 집을 떠난 지 5박 6일 만에 다시 집으로 온 것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방으로 들어가 교복도 벗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잠들어 버렸다. 잠을 안자고 버틴지 120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잠든 지 17시간 만에 깨어났다. 깨어남과 동시에 후회와 허탈감, 좌절감에 빠졌다. 결국 나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모두 실패로 끝났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래도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학교와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밤 12시가 되면 공원으로 왔다. 그래도 나름 타협을 해서 무조건 밤을 세지는 않았다. 너무 졸리면 새벽 3~4시 쯤에 벤치 위에 누워 신문지를 덮고 잠들었다. 삭발한 채 교복을 입고 잠자는 나를 누구도 건들지 않았다. 다만 공원 안의 몇 노숙인들이 나를 보며 이상한 웃음만 지었다. 어느 날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이 공원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이미 다른 노숙인이 그 안에서 자고 있었다. 다행히 옆 칸은 비어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엎드려 잤다. 허리가 아파서 2시간 만에 깨어났다. 그리곤 다시 서울 시내를 돌아 다녔다. 걷다 보면 지하철이나 다른 공원에서 다양한 노숙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중엔 여자도 있었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노숙자도 있었다. 당시로선 귀하던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는 노숙자도 있었다. 난 그들을 혐오했다. 나는 이렇게 밤을 새면서 죽어라 하고 공부하는데, 그들은 게을러서 공짜 밥이나 먹고 길거리에서 잠자는 나약한 쓰레기들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여름방학 한달 내내 공원에서 지냈다. 여름이라 춥지 않아서 가능했다. 그래도 새벽 4~5시가 되면 추운 기운에 햇빛이 눈부셔서 저절로 눈을 떴다. 게다가 공원을 가로질러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창피해서라도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마음은 집보다 공원이 편했다. 나와 갈등을 빚는 아버지도 싫었고,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우울해하는 어머니도 보기 싫었다. 끼니는 24시간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가끔 공중전화로 어머니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다. 혹시나 나를 찾아 올까봐 공원이 아닌 곳에 약속장소를 잡았다. 그러면 난 돈만 받고 바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난 단호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나를 만나기 위해 새벽 4~5시마다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리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학교 수위아저씨들로부터 미친 여자로 오해를 받았었다.

 

  방학 내내 새벽마다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제는 멈출 수 없었다. 수능일은 다가오고 초조함과 실패감, 좌절감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온 몸을 혹사 시켜가며 거리를 걷다보면 머릿속에 잡념이 사라졌다. 다리가 아프고 몸이 피곤해도 마음은 편했다. 세상이 모두 어두워지면 별 빛과 가로등 빛 사이로 혼자 걸어 다녔다. 나의 보물이던 MP3로 음악에 취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걸어 다니며 자주 듣던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 노랫말처럼 나는 그렇게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내 두 눈 밤이면 별이 되지~ 나의 집은 뒷골목~ 달과 별이 뜨지요~”

 

  이런 나의 이야기를 의정부 아이들에게도 나누었다. 그러자 아이들도 자신의 삶을 솔직히 이야기해줬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부모의 학대와 학교 폭력은 물론 성적인 문제와 경제적 문제까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눈물을 흘리거나 어두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서로 비슷하게 겪었던 아픔과 상처를 나누고 공감했다. 아픔과 상처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다만 성숙한 시선과 자세로 극복하며 살아갈 뿐이다. 한 아이는 자신처럼 불행한 친구들을 돕는 청소년 전문 사역자를 꿈꾸고 있다. 자신을 버리려 했던 부모를 보듬고 이해하려는 아이도 있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성숙해진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손길이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너희는 다른 아이들처럼 따뜻한 부모 품에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직접 너희들을 키우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직접 키우고 계셔..”

작성일:2018-01-01 11:26:35 183.96.97.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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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ap Lim 2018-01-17 20:07:45
저도 그 의정부 청소년 쉼터 숙직교사로 일했었습니다. 아이들이 욕도 많이 하고 사나웠지만 저는 그런 아이들일수록 예쁘더라고요. 하지만 아이들 중에 폭력을 쓰고 싸우던 일이 있고 난 뒤(저도 말리다가 맞을 뻔 했지만 치면 맞지 뭐 하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아이의 눈빛을 휘어잡았더니 저를 치려고 든 상을 저에게 안 던지고 다른 곳으로 던지고 선풍기를 부수더라고요.) 암튼 그 후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큰 맘 먹고 아이들 자는 밤에 맥주를 사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나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다른 선생님께 이르는 바람에 그 곳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담배는 한 개비씩 허용하는데 왜 술은 안 될지... 하지만 저는 법을 어겼기에 그만두는 개 책임지는 일이었지요. 그 후 폭력 때문에 노숙하는 아이들과 계속 연락하며 설 연휴에는 모탤에 데려가 씻고 자게 하기도 하고 밥도 사주고 용돈도 주기도 했습니다만 저도 삶이 어려워 솔직히 말하니 아이들도 아르바이트를 구했거나 다른 쉼터로 갔는지 연락을 안 하게 되었어요. 폭력적인 아이들이 저는 더 솔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폭력을 잠재우는 방법을 배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쉼터에서는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해야 했기 때문에 숨막히기도 했지만 아프던 아이를 위해 계란죽도 끓여주고 경찰서에 도벽으로 보호관찰받는 아이도 편견없이 도와주니 아이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더군요. 아이들의 밤을 같이 지켜주던 그 시간이 즐거운 추억으로 떠오르네요. 하지만 거기 선생님이 제가 그만둘 때 저를 쓰레기 취급을 하시던 것은 슬프게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키니 그런 태도는 당연한 처사지만 갈곳 없어 온 아이들에게 질서를 가르친다는 미명 하에 억압하는 것도 없지 않아서 많이 아쉬운 점도 많았습니다만 기관은 공적 재화를 운용해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지 않나 싶네요. 갑자기 제가 근무했고... 봐주실지 논의하는 과정 중에 스스로 그만 둔 그 곳의 추억이 생각나 적어 봅니다.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만난 현실이 아팠던 소중한 기억이네요. 저는 공적으로는 잘못했지만 이미 할 거 못할 거 다 하고 다니는 아이들에게 사적으로는 필요한 일이었다고 아직도 생각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유가 맞을지 모르겠으나 망상이 심한 환자에게 억압만을 얘기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트라우마나 망상을 대면하여 시간을 정해 댜화해 보라는 정도의 치유책이 필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기관의 교사로서는 자격미달이라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만두었지요. 만약 제가 선생님같은 분을 학생으로 만났다면 글쎄요,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요? 탁월한 선택이다만... 건강을 생각하며 잠은 자라고 했겠어요... 좋은 추억 아픈 추억 모두 우리가 만날 다음 세대에게 혹은 우리 자신에게 약이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