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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 [비회원]
1.
어릴 때, 나는 죽고 싶었다. 그러나 또한 나는 죽음이 무서웠다.
2.
내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 했던 이유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사방이 꽉 막혀, 어디로 몸과 마움을 둘 지 모를 상황에서, 주위의 환경과 사람은 나의 존엄성을 침범한다. 그 정도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심해져 극단에 이르르면 나 자신이라는 인간을 의심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학교에서의 일……집에서의 일……. 나에게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었고, 되돌아보면 정말로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러한 슬프고 아픈 일들이 이제는 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공유되고 있으므로 내가 이 이상 자세히 증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세상에 알려진 사례들만큼이나 슬펐고, 아팠다. 이 정도의 증언이면 충분할 것이다.
어렸던 시기에, 정말로 죽고 싶었던 어느 날에,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죽어 사라졌을 때를 상상했다. 나의 부모가 슬퍼해 줄까, 나를 극단으로 내몰았던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후회할까. 내 머릿속엔 그런 이상적이면서 한편으론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정말로 죽고 싶었던 어느 날은 자주 내게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나는 상상하는 것을 되풀이했다. 몇 번을 상상했는지, 상상한 뒤에는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적 기억은 멀고 흐릿하다. 기억들은 부지불식간에 머릿속에 떠올라, 내가 언어의 형태로 정제하기도 전에 휘발되어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나는 죽음을 바랬으나 죽음이 무서웠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 뒤에 찾아올 감각의 상실이 두려웠다.
3.
죽는 것보다 감각의 상실이 두렵다는 말은 얼핏 보면 무슨 말인지 가늠할 수 없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이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조금 익살스러운 예시를 들어보자. 치킨을 좋아하는데 치킨을 먹을 수 없게 된다. 양념치킨의 그 감칠맛과 후라이드 치킨의 고소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랬다. 나는 치킨을 먹고 싶은 마음에 14층에서, 8층에서 뛰어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익살스럽고, 어쩌면 눈물겨운 말일 터다. 사람의 안온함도 아니고,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도 아니고 그저 먹는 것 하나 때문에 삶을 선택한 것이. 그러나 나는 그러했고, 그래서 이 곳에 실제한다. 돌이켜보면, 치킨뿐만이 아니라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때때로 보여주는 부모의 미련같은 사랑, 그나마 인간으로써 존엄을 존중해주던 동창들, 동네에 잔뜩 자리잡았던 꼬치집의 냄새, 내가 알지 못하던 곳에 다다를 때마다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던 희미한 열기. 어렸던 나는 그 의미와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옆에 분명히 실존했다. 비린내, 비린내라고나 해 두자. 때때로 멀어지고 싶지만, 결국엔 비린내 사이로 몸을 비비고 들어가 살아야 할 무상함을, 어쩌면 어렸던 나는 그때부터 일찍 깨달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비린내가 싫으면서도 간절했다. 나는 메말라 삐쩍 마른 심상에 내리는 그 단비가 간절했다. 그 단비에서 나는 물비린내가 간절하여 죽기 싫었고, 죽어서 그 모든 것들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하니, 나를 살린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의 간절함이었다. 어렸던 마음으로는, 아니, 아예 나의 마음이란 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던 어렸던 나는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었으나, 분명히 존재하던 간절함이었다.
4.
학교로부터 벗어난 지 몇 년이 지났다. 기억은 상실되고 퇴적되고 풍화되어 예전같은 무게감을 지니지 못한다. 예전보다 가벼워진 무게감을 느끼며, 부지불식간에 기억이 떠오른 어느 때에, 나는 이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나 자신에게 이유를 물어도 뚜렷히 떠오르는 까닭은 없다.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인지, 아니면 어렸던 나와 똑같이 삶에게서 고통받고 있는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한 것인지. 후자는 아무리봐도 기만하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기억에서 느끼는 무게감과 지금 당장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의 무게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두 생각은 동일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게 간사함이라 불리는 것이 아닐지.
어쩌면 나의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한 기억을 한심하다 평가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는 나의 기억으로 눈물지을 누군가가 좀처럼 상상되지 않는다. 내 기억과 같은 일들은 내가 어렸을 때에도 세상 위에 무수히 존재했으며, 지금도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거기에 자신을 하나하나 대입하고 이해하기에, 살아있는 사람에게 허락된 여유는 비좁기만 하다.
그러나 그 살아있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 자신이다. 어쩌면 삶의 마감이라는, 죽음의 언어로써 기억을 표현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나, 나는 지금 살아있고 살아있는 자들이 쓰는 세상의 언어로 내 기억을 불완전하게나마 서술하고 있다. 불특정다수를 설득하고 눈물짓게 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기사를 보다 문득 떠올라 언어의 형태로 기억을 서술하는 익명의 누군가이다. 괴로운 기억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삶 당하게' 된 세상의 탕아다.
어렸던 나를 아는 이들은 이런 식으로라도 살아서, 살아있는 자의 언어로 기억을 꺼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앞의 말을 정정하겠다. 나는 내 기억을 언어의 형태로 남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누군가가 있었고, 어떠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제는 기억을 언어의 형태로 부족하게나마 표현할 정도로 자랐다. 우울증에게서 겨우 벗어난 지 몇 년이 지났고, 나의 과거를 아는 자들은 주변에 몇 남지 않은 때이다. 죽음과 상실을 별개의 문제로 놓고 보게 될 수 있게 된 때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죽음이 무섭지 않다. 죽음 그 자체는 무섭지 않으나, 그 뒤에 찾아올 감각의 상실이 두렵다. 나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릴 때보다도 사방으로 감각의 뿌리를 뻗치는 지금이기에 더욱 그렇다. 상실의 허망함을 감당하기에, 살아있는 나는 너무나도 예민하고 초라하다.
그러니 나는 살 것이다. 살아서, 내 감각이 닿는 모든 것을 느끼며, 어릴 때의 내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해주며. 그러다 끝에 다다라 고꾸라진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자연사일 것이다. 아무런 애도나 은총이 필요하지 않은. 나 하나 없다고 안 돌아갈 세상도 아니고, 내가 있다고 안 돌아갈 것도 아니니. 그러니 나는 삶의 끝에 있을 자연사를 향해, 살아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