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제목

아동학대 생존기1

등록일
2016-03-06 03:43:20
조회수
1701

아동학대 생존기①-인트로

 

대체 어디서부터 내 얘기를 시작해야할까. 머릿속에 수 만 가지, 셀 수 없는 말들이 떠돈다. 나는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였다. 그것이 약이 될 때도 있었지만 독이 되기도 했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을 잘 정리해보고 싶었지만 성장과정에서의 여러 가지 문제들, 그로 인해 어린시절부터 앓아온 만성우울증(우울장애)과 섬유근육통(화이브로마이알지아)에 의한 브레인 포그(머리가 멍한 상태) 때문인지 집중이 쉽지 않았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되지만 여전히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나마 나에게 요행인 것은 상위1%에 드는 지능지수였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졌지만 웬만한 지적활동은 남만큼은 할 수 있어 외부적으로는 병세가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아동학대 피해자였고 생존자다. 너무 거창한 정의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성장기에 겪은 가정 내 폭력과 가학을 이 이상의 단어로 설명하긴 어렵다. 내가 가진 문제들과 증상들은 이미 내가 기억하지 못 할 무렵부터 시작됐다.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격장애자 아버지, 수동적이고 무기력하면서 히스테리 발작과 투사 등의 정신증을 지니게 되며 자식을 괴롭히기 시작한 어머니, 그로 인해 미움과 분노의 장의 된 가정, 극악한 상황 속에서 이기적인 선택을 하며 아버지의 룰을 따르기로 한 남동생. 자아인식·자기성찰이 부족해 무지하면서도 제대로 된 보호자 역할을 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부모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세상으로부터의 상처들.

압축성장이 낳은 급격한 세대차, 독재정권에 의해 고착화된 후진적 인권의식, 경제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낮은 아동인권 감수성, 유교문화의 잔재인 가부장적 사고관과 효사상으로 인한 편견, 무한경쟁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무자비한 교육열, 주입식교육으로 인해 전반적 양식수준이 떨어지는 사회구성원들, 여전한 성차별로 인한 여성의 대상화와 성적대상화 등 우리사회의 총체적문제들이 한국여성으로 교육받고 살아가야하는 나의 영육을 좀먹고 병들게 했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수그러들었지만 최근 미디어에서는 아동학대 뉴스로 떠들썩했다. 친부와 동거녀에게 감금돼 상습적인 학대를 받다가 가스관을 타고 탈출한 11살 소녀가 구조되면서 교육부가 장기결석 아동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섰고, 부모에게 살해된 아이들이 줄줄이 발견됐다. “인천 11살 소녀가 강한 생존력으로 탈출하지 않았다면 아마 죽어서 나왔을걸. 아마 자기자식 패 죽여 어디 야산 같은데 파묻고 실종이나 가출신고 해버린 부모들도 많을 거”라고 했던 내 예측대로였다.

매스컴의 속성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엽기적인 사건이 하나 터지자 사람들의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동학대에 대한 기사가 연이어 나오고, 이웃나라 일본을 비롯한 해외사례까지 찾아 보도한다. 그러니 갑자기 아동학대가 폭증한 것처럼 느껴 세태비판을 하는 이도 있겠지만 아동학대 발생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 터이다. 뉴스도 사회인식에 따라 진화한다. 부모살해 등 패륜적이라 여겨지는 사건이 더 크게 보도되던 때가 있고, 매맞는 아내,  부부강간, 데이트폭력 등이 사회문제화 되기도 한다. 이제야 아동인권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기에 화제가 될 수 있었다.

아동학대도 여러 층위가 있겠지만 나는 굶거나 학교에 보내지지 않은 아이는 물론 아니었다. 이 때문에 나의 정의에 반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배부른 고민이라 치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절대적 학대를 받고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다. 다행히 나는 배고픔을 걱정할 일도 없었고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누가 더 심리적·정신적 고초를 겪었는가를 두고 상대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나 역시 나만 가장 오래고 깊은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장기 내내 노출되고 일생을 거쳐 마주해야하는 가족이 주는 고통은 많은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

8·15광복과 한국전쟁 등 험난한 시대를 거쳐 온 아버지는 별 기억나지도 않는 사소한 이유로 나를 잡아끌어 마구 때리며 “밥 먹여주고 학교 보내줬는데 뭘 더 바라냐”고 했었다. 소위 강남에서 자라며 경제성장의 수혜를 고스란히 받은 첫 세대인 X세대였던 나에게 그러한 아버지의 가치관은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아버지는 다 큰 처녀가 된 대학원생이었던 나를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패고 맨몸으로 내쫓아 수년간 길거리를 헤매며 고아처럼 떠돌게도 하는 사람이다.

목사인 친부와 계모에게 맞아죽어 미라로 발견된 여중생 사건에 “얼마나 대들었으면 그랬겠냐”고 말하는 사람.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고 자녀살해는 범죄 축에도 못 들던 전근대적 사고가 여전히 용인되는 사회이기에 아버지 같은 ‘괴물’이 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며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부상정도나 상처가 심하지 않은 폭력, 구체적인 성폭력이 아닌 이상 체벌과 훈육이라고 주장하고 있을 것이다.

부모의 잘못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삶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승화’라는 기제는 지옥같은 세월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힘이었다. 내가 외면적으로 괜찮아보인다고 해서 상처입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는다. 부모의 잘못을 지적한다고 해서 나를 배은망덕한 패륜아로 치부하는 시선이 있을 것도, 나를 성장기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미성숙한 ‘루저’ 처럼 취급하는 시선이 있을 것도 안다. 인습에 얽매여 상상력이나 공감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어디나 있는 법이다. 타인을 깎아내리고 은근히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이중인격자도 은근히 많다.

개개인의 삶을 모두 추적할 순 없지만 인터넷시대를 맞아 익명에 빌어 자기 이야기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가정폭력을 다룬 기사에는 수많은 자기체험이 댓글로 달린다. 커뮤니티 게시판에 누군가 가정불화와 학대경험을 털어놓으면 연이어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는다.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인지 차마 밝히지 못했던 개인의 상처가 이렇게 만연했나 싶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 한국은 항상 행복지수 등 좋은 것에는 하위권, 자살률 등 나쁜 일에는 상위권을 기록한다. 각 사회구성원이 행복하지 못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사회구조적 문제 개선을 외치지만 우리는 왜 하나같이 불행한 것인지, 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의 치유를 위해서, 또 나와 같은 사정을 겪고 있을 또 다른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내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다. 한 개인의 삶이 그가 소속된 사회와 동떨어질 수 없는 만큼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라는 명제는 이 글에도 적용된다.

작성일:2016-03-06 03:43:20 122.45.157.3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게시물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
조장원 2016-03-09 11:44:22
'부모의 잘못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삶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라는 얘기가 와닿네요.
김기자님 글 앞으로 계속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