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해에 닿아 잎끝이 타버린
봄 가을로 가로수나 아파트 단지, 광장 같은 곳들에 살벌한 다듬기가 벌어진다. 여름내 늘어진 가수로와 흙이 있는 모든 곳에 가득자란 잔디와 광장의 시들거나 죽은 식물을 대대적으로 손을 본다. 이 과정을 ‘전정’이라고 부른다. 이건 나만의 오해인지 모르겠지만, 이전에는 그만큼 막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요새는 살벌하다. 손에 잡히는 가지는 얇든 굵든 다 베어버린다. 원래 전정이 이런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마구 베어낸다. 마치 메두사의 머리를 짧게 잘라낸 것 처럼 흉하고 보고 있기 참 어렵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식물의 환절기를 말랑하게 그냥 보내서는 안된다. 가지 하나, 잎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는 식물 입장에서 여름 내내 풍성하게 자라기만 한 모든 가지와 모든 잎이 이대로 있다가는 겨울에 버틸 힘이 부족하다. 그냥 두면 분명 전체가 죽게 될 것이다. 매미가 울음을 멈추고 옷장을 한 번 뒤적이는 그 쯤, 나는 모든 식물을 천천히 둘러보며 전정을 시작한다. 향후 어떻게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큰 그림을 상상한 채, 그 모습을 제외한 가지들을 잘라낸다. 아까울 것 하나 없다. 다음해가 되고 봄이 오면 잘라낸 가지 양 옆으로 더 풍성하게 자라낼 테다.
많은 경우 환절기에 사람들은 감기가 걸리거나 심하게 몸살을 앓는 경우들이 있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이게 자연의 순리인 걸까, 싶을 정도로 일교차는 노란 하엽을 만들어 떨궈낸다. 샛노래진 잎들이 잎 전체의 반쯤 되면 비가 오고 바람이 거세진다. 사람은 살이 찌는 계절에 식물은 품이 줄어드는 계절인 셈이다.
가을이 오면 우울증을 앓는 이들의 병이 더 짙어진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나는 그랬다. 어쩌면 나는 가을이 되기도 전에 찬바람을 먼저 알아채고 노란 하엽이 되고 있는 나뭇잎 같았다. 독감을 피하기 위해 백신을 맞듯이, 겨우내 죽어버리지 않으려고 미리 아프기라도 하는 듯이. 앓고 또 앓았다.
때론 흔들리고 나부끼는 나의 모든 잎들이 한심스러웠다. 별 일도 아닌 것에 모두 반응하는 내 마음이 창피하고 불안했다. 그런데 식물을 가만 보면 그렇다. 식물의 중앙 가지가 굵게 자라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거센 바람이라는 것. 그것을 이겨내려는 모든 휘청거림 들이 그들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흔들려도 가끔 화분이 넘어져 버려도, 어찌되었든 버텨야 한다. 어떤 야비한 수를 쓰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그 뒤에 오는 작은 보상들이 마뜩지 않더라도 별 수 없다. 단맛을 보상으로 얻기 위해 살아남는 것은 아니니까.
나의 모든 잎이 하엽이 되고, 나는 겨울잠을 자는 식물 줄기로 남을지라도 볼품없어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되더라도, 버터야만 한다. 버텨서 살아내고 나서 그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삶의 가치나 불합리함 같은 것들 말이다.
식물을 전정 할 때, 해에 닿아 잎 끝이 탈지라도 그것을 이유로 잎을 잘라내지 않는 것 처럼, 나에게 새겨진 생채기가 나의 전부를 잠식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야 한다.
노란 하옆과 짙은 초록잎이 어울어져 그 나름의 절경인 것 처럼, 몰래 자라난 흰 새치가 나의 흉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처럼 오늘은 살아내고 내일은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