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냉소와 자기연민의 사이

 

지구의 악마들을 무찌르기 위해 온갖 영웅이 필요한 것 처럼, 마음 속 가시들을 사라지게 하려면 내게도 영웅이 필요하다. 살아가는 동안 우울증, 불안, 공황장애 등 으로만 힘든 건 아니다. 우리에게는 숙제처럼 매일 각자 해내야 하는 몫이 있다.

 

매일의, 매 해의, 생애의 숙제는 때때로 평가받는다. 숙제를 해내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벗어나려고 무시하고 도망치고 포기한다. 힘에 부쳐서 못다한 일 들도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숙제를 평가하는 이들은 때로 친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가 되기도 한다. 가장 날카롭고 거짓이 통하지 않으며 냉철한 평가자는 나 자신이다.

 

어쩌면 스스로를 아주 잘 아는 양심의 잣대라면 동시에 나는 나를 아주 모르기도 하다. 어떤 날은 스스로에게 매우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다. 그 틈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촘촘한 냉소의 틈에서 살아날 마음은 없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데 그런 내가 또 다시 상처를 받는 순환구조 이다. 상처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은 그 상황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곤 한다. 상대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그런 주제의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한다.

 

그 상대가 ‘냉소적인 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다수의 나는 나를 버릴 수 없고, 그런 나를 언제까지나 외면 할 수도 없다. 내 안에 존재하는 차가움, 가시를 세운 선인장 같은 판단, 자비심 없는 좁은 마음. 내 안의 자기연민이 없었다면, 어쩌면 차가운, 가시에 고통받아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측은지심의 마음, 내가 나를 가장 잘 알기에 공감할 수 있는 불쌍하고 억울한 나 자신. 자기연민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좁고 답답한 냉소 속에서 살아남을 숨구멍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내가 처음 정신병원에 걸어 들어갔을 때, 나는 한동안 한 없이 아픈 냉소와 들끓는 자기연민 사이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충분히 아플만 했지만, 나약하게 아파서는 안됐다.’

 

이 이상한 문장이 공감이 갈 수도, 그저 엉망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한 번 굴레에 들어서면 빠져나오는 과정은 마냥 쉽지는 않다. 한웅큼의 약을 끼니마다 먹으며 스스로 재촉한다. 주변에서

 

“정신과 약 오래먹지 말아라.”

“언제까지 약 먹어야 하는거니.”

“약에 의존하게 되면 인생이 무너진다.”

“드시는 약이 많아서 저희 병원에서는 해드릴 수 있는게 없습니다.

 

등의 걱정과 협박, 체념 사이에서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걸 듣는 나는 매번 잘 참지만, 혼자 남으면 아픈 말들에 상처받고 몸서리 치기도 한다. 그때 그리도 몸서리친 말들을 내가 다시 주어담아 나에게 들어붓는다. 그렇게 상처를 받으면 보상심리인지 한동안은 나는 내가 불쌍하다. 이러다 정말 사라져버릴 것 같아 초초하다. 어떤 때에는 이 세상 나 혼자만 내 편이니 너그럽게 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자꾸 역성을 들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억지로 자기변호의 그늘 아래로 도망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냉소도 자기연민도 모두 나에게 도움되지 않는 한때의 강렬한 감정일 수 있다. 오락가락 하는 마음의 중간 어디쯤이 평화의 지대일 수 있겠다. 내가 ‘마음읽기’에 집착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마음의 뿌리를 찾거나 곁가지로 나오는 행동의 영향에 대해 생각한다. 특별한 방법은 없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만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데 시간을 쏟고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의 영점을 찾는데 집중하다보면 언젠가 내가 나를 다그칠 때, 지나친 연민을 할 때, 다시 영점을 찾으려 노력할 수 있다. 당장 찾아지지 않아도 좋다. 나를 아주 잘 아는 내가 되기 위해 마음 먹어보는 것, 그것 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다. 더 나아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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