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 글은 강박증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며, 의학적·심리적 진단이나 처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정신건강 전문가의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앞서 강박증이란 무엇인지, 강박 사고와 강박 행동이 어떻게 악순환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회피라는 전략이 얼마나 치밀하게 우리의 불안을 부추기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수용전념치료(ACT)를 통해 불확실성이라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태도의 중요성도 말씀드렸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강박증과 관련된 생각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기술, 즉 ‘인지적 탈융합(cognitive defusion)’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강박 사고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생각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생각에서 한발짝 물러나기 : 인지적 탈융합이란?
강박 사고를 말할 때 흔히 “원치 않는 침투적 생각”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컨대 “내가 문을 잠그지 않았을지도 몰라” “손이 더럽혀져서 병에 걸릴지 모른다” 같은 부정적인 예감이나,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될까”라는 극단적 공포가 강박 사고의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들이 떠오른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생각을 전적으로 ‘진실’로 받아들여 몸과 마음이 크게 반응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강박증을 겪는 분들은 보통 이 침투적 사고를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애쓰거나, 그 불안을 없애려는 행동(확인, 세탁, 회피 등)에 몰두하곤 합니다(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013).
인지적 탈융합은 생각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서 “이것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과정입니다(Hayes, Strosahl, & Wilson, 1999). “내가 문을 안 잠근 것 같다”라는 사고가 순간 떠올랐다고 해서, 실제로 문이 열려 있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강박증 환자분들은 순간적으로 “혹시나…” 하는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 불안이 더 큰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이런 자동적 연결을 끊어내려면, 우선 생각과 현실을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는 기법이 필요합니다. 그 기법이 바로 인지적 탈융합입니다.
탈융합을 연습하는 방법 : ‘생각은 생각일 뿐이야’
강박적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은 생각과 “융합(fusion)”되어버립니다. “내가 혹시 이런 잘못을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그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잘못을 한 것처럼 느끼거나,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믿게 됩니다(Rachman, 1997). 마치 생각과 현실이 구별되지 않고 딱 들러붙어 있는 상태인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인 탈융합을 통해 우리는 이 둘 사이에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문을 열어두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올라오고 있네”라고 말로 표현해 보며, 생각 그 자체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생각일 뿐이야”라는 문장을 마음속에서 되뇌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Hayes et al., 1999). 생각을 생각으로 보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생각을 억지로 지우려고 하거나, 그걸 무시하려고 하기보다, 생각이 떠오르는 걸 인정하면서도 휘둘리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부정적이고 불길한 내용의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강하게 부정하거나 없애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생각이 더 강해지는 역설적 현상을 경험하곤 합니다. 인지적 탈융합은 생각을 “지우는” 대신, 그냥 “그대로 두되 다른 방식으로 대한다”는 관점에 가깝습니다. 이때 우리는 생각을 일종의 단어 덩어리나 이미지로 바라보면서, 그와 함께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Foa & Kozak, 1986).
강박증을 이해할할 때, “저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멈출 수가 없어요”라는 말씀을 자주 듣습니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이것은 어리석은 걱정이다”라고 이해하고 있음에도, 감정적인 반응이나 신체적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가 확인이나 세척, 회피 행위를 통해 안도감을 얻고 싶어지지요. 그러나 만약 이 지점에서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진짜로 믿고 있나? 아니면 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흘러가는 단어들일 뿐인가?”라고 자문할 수 있다면, 자동적 반응을 조금 늦추면서 새로운 선택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Lee & Kwon, 2003).
예를 들어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면, 그것을 가볍게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거나, 눈을 감고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관찰해보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아, 내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라는 문장을 생각 중이구나. 이게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는데, 생각만 계속되는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생각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과는 분리된 이벤트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그 생각이 주는 힘이 이전만큼 강하지 않아질 수 있습니다(Hayes et al., 1999).
‘생각과의 거리 두기’의 중요성
인지적 탈융합 기법은 수용전념치료(ACT)의 여러 핵심 요소 중 하나이지만, 강박증 치료 전반에서도 유용하게 쓰입니다(Abramowitz, Taylor, & McKay, 2009). 강박 사고가 떠오를 때마다 즉각적인 불안 반응을 하기보다 “생각을 생각으로 보고, 그것이 마음속을 지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연습함으로써, 우리는 미묘하게나마 선택의 여유를 얻습니다. 이를테면 “아, 또 이런 불안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네. 그래도 이걸 반드시 믿을 필요는 없어. 그대로 놔둬도 괜찮을 수 있어”라는 식의 태도로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말처럼 쉽게 생각과 분리될 수 있느냐”고 의문이 들 수있습니다. 실제로는 인지적 탈융합 연습이 초반에는 어색하고 힘겹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강박증 환자분들은 “내 머릿속 생각은 꼭 진실처럼 느껴지는데, 그걸 그냥 ‘생각’이라고 인식하기가 너무 어렵다”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그것만큼 생각과 현실이 섞여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탈융합은 바로 그러한 융합 상태에서 조금씩 거리를 만들어 가는 연습이므로, 시간을 갖고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Foa & Kozak, 1986).
중요한 것은 이렇게 생각과 거리를 두는 것이, 곧바로 불안을 없애는 마법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지적 탈융합은 생각이나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막아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생각이나 감정이 올라왔을 때, 그것에 자동으로 휘말리지 않고 “지켜보는 자리”를 찾아가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간격이 곧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줍니다. 예컨대 한참 불안이 올라오는 중에도, “내가 이걸 잠시 관찰하고 있어. 예전이라면 지금쯤 벌써 열 번 확인하고 있을 텐데, 이번에는 조금 더 버텨볼 수도 있겠네”라는 식의 시나리오가 가능합니다.
또한 인지적 탈융합은 수용전념치료가 강조하는 가치 중심 행동과도 맞물려 있습니다(Hayes et al., 1999). 만약 어떤 강박 사고 때문에 누군가와의 약속을 무조건 취소하곤 한다면, 불안을 잠시 놓아두고 “이 만남은 내게 중요한 가치와 관련되어 있으니, 비록 불안하지만 가보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시도를 할 수 있습습니다. 이 결정을 내리는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머릿속 생각을 전부 믿지 않아도 괜찮다. 불안이 있다고 해서 그 일이 위험한 것은 아닐 수 있다”라는 인지적 탈융합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생각은 내가 아니고, 나는 생각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생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더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을 그 자체로 보며 현실과의 간극을 분명히 인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박 사고를 무조건 밀어내거나 없애려 하기보다는, “지금 이런 사고가 떠올랐지만, 이건 단지 생각일 뿐이고 나는 이 생각과 100% 같지는 않다”라는 자각이 핵심입니다. 이런 접근이 자리 잡으면, 강박 사고가 떠올라도 “아, 또 저런 생각이 오는구나” 하며 내쳐낼 것인지, 아니면 잠시 두고 볼 것인지, 혹은 지금 필요한 다른 행동을 할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Lee & Kwon, 2003).
강박증을 다루는 과정은 한마디로 쉽지 않습니다. 불안을 없애려 하는 직접적 시도가 오히려 불안을 강화한다는 역설 때문에, 치료도 다층적인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인지적 탈융합은 그중에서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생각이 정말 진실인지, 아니면 단지 머릿속 스쳐 지나가는 구문인지”를 확인하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기술입니다. 머릿속에서 완벽한 확신을 얻으려는 노력을 내려놓고, 오히려 생각을 조금은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험이 쌓일 때, 우리는 강박 사고를 대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013).
끝으로, 인지적 탈융합은 단 한 번에 터득되는 기술이 아니라, 반복적인 연습과 시간을 요합니다. 처음에는 “그게 되겠어?”라고 의심하게 되더라도, 조금씩 시도해보시면 “생각은 그냥 생각이다”라는 사실이 실감 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이어질 때마다, 과거라면 무조건 강박 행동이나 회피로 대응했을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볼 수 있는 자유가 생깁니다. 강박증이 줄어드는 변화를 체감하는 길은 어쩌면 그처럼 미묘한 간극을 찾아내는 데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강박 사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을 없애거나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새롭게 바라보며 나의 주도권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에 융합되지 않고 탈융합된 시선으로 볼 수 있을 때, 강박증이라는 크나큰 무게 역시 조금씩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스며들 기회를 마련하게 될 겁니다.
강남푸른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신재현 원장
참고 문헌
Abramowitz, J. S., Taylor, S., & McKay, D. (2009). Obsessive-compulsive disorder. The Lancet, 374(9688), 491–499.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APA). (2013).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5th ed.). Washington, DC: Author.
Foa, E. B., & Kozak, M. J. (1986). Emotional processing of fear: Exposure to corrective information. Psychological Bulletin, 99(1), 20–35.
Hayes, S. C., Strosahl, K. D., & Wilson, K. G. (1999).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An experiential approach to behavior change. New York: Guilford Press.
Lee, H. J., & Kwon, S. M. (2003). Two different types of obsession: Autogenous obsessions and reactive obsessions. Behaviour Research and Therapy, 41(1), 11–29.
Rachman, S. (1997). A cognitive theory of obsessions. Behaviour Research and Therapy, 35(9), 793–802.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나를 살피는 기술>, <어른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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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만나고나서 분노를 좀더 잘 다루게 된 것 같아요"
"신재현 선생님의 따뜻한 조언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어요"
"지방이라 멀어서 못 가지만 여건이 되면 찾아가고픈 제 마음속의 주치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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