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언젠가부터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정신건강관련 용어가 있습니다. 바로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입니다. 힘들었던 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인기 드라마를 보며 사람들은 “PTSD 온다”라는 말을 일상용어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자연재해, 부실한 시스템과 허술한 안전관리로 초래된 인재(人災)로 인한 안타까운 피해들은 PTSD를 우리 사회에 늘 존재하는 것으로 체감하게 합니다.
90년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과 붕괴사고, 2000년대 미국 9.11테러를 기점으로 그 후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이어진 테러, 최근에는 2년간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국내에서는 대구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까지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았고, 현재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이런 인재만 아니라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2011년 동일본 대지진, 2019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호주 산불, 현재 진행 중인 캐나다 산불 등 많은 자연재해가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고문, 교통사고, 성폭행과 같이 생존에 위협이 되는 다양한 사건에 대한 직간접적인 노출은 우리에게 많은 물리적, 신체적, 정신적 상흔을 남깁니다.
이런 트라우마 사건에 노출된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의 안정을 찾고 일상을 회복하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하며 오랜 기간 후유증을 겪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심각한 심리적, 사회적 어려움을 경험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PTSD 진단을 받게 됩니다.
PTSD의 주된 증상으로는 트라우마 사건에 대한 기억과 그와 연합된 이미지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플래시백, 트라우마 사건 현장에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재경험, 작은 자극에도 과도하게 놀라거나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과각성, 사건과 관련된 장소나 사람, 자극을 피하는 회피, 일상적 활동에 대한 관심의 저하와 정서적 둔마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증상은 트라우마 사건 당시 경험했던 공포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과 연관이 있는데, 트라우마 사건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다시 경험되는 듯이 생생하게 지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트라우마 경험이 뇌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 관련 뇌과학 연구들은 트라우마가 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이것이 트라우마 사건 이후에도 지속되는 공포반응과 과각성, 침습과 같은 증상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연구해왔습니다. 많은 연구에서는 트라우마 증상들이 1) 감정 인지 및 조절 중추로서 생존과 관련된 입력정보를 처리하는 편도체, 2) 지적, 감정적, 사실적 정보를 처리하며 기억과 학습을 담당하는 영역인 해마, 3) 고차원적 사고와 추론을 관장하는 전전두엽 피질, 4) 자기조절을 통해 고통이나 통증, 쾌락, 보상 등에 대한 반응을 관리하는 전대상회에서의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에서 전대상회 이상과 편도체의 과활성화, 해마 부피 감소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Hamner 등(1999)은 특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전대상회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이 모델에서는 전대상회, 편도체, 해마, 청반이 이 과정에 관여한다고 제안합니다. 전대상회에서는 대뇌백질의 감각영역과 시상의 감각영역을 통해 입력되는 외부 자극의 전달을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전대상회는 또한 편도체와 함께 반응을 마친 내부자극을 소멸시키고, 이렇게 처리된 내부자극은 해마를 통해 전달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대상회는 트라우마와 관련된 내외부자극을 전달하는 통로 및 관련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청반의 교감신경계 활동이 강화되면 전대상회의 기능이 저하되며, 전대상회와 편도체 사이의 회로에 이상이 생기면 트라우마 관련 자극에 대한 처리 및 반응에서의 이상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한편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학교 조준형 부교수 연구팀은 수개월 또는 수십 년 전 경험한 트라우마에 대한 공포기억이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기억세포의 연결 강화를 통해 뇌에 저장된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습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기억 세포 간 강화된 연결고리로 인해 그와 유사한 기억이 활성화될 때 다시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실험쥐의 기억세포를 억제했을 때는 공포기억을 회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전전두피질에 공포기억을 갖고있는 실험쥐를 전기 충격 없이 공포 관련 상황에 반복 노출했을 때는 기억세포 사이의 연결이 약화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이후 나타나는 증상들이 단지 마음의 문제, 즉 인지적, 정서적 측면뿐만 아니라 뇌에서의 변화와 그로 인한 생리적 반응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와 치유에 관한 내용을 담은 <몸은 기억한다>의 저자이자 PTSD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베셀 반 데어 콜크(Bessel Van Der Kolk)는 트라우마가 몸에 새겨지는 것, 즉 뇌 영역에서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서는 상담과 이야기를 통한 치료뿐만 아니라 뇌 회로의 재연결, 타인과의 관계회복과 같은 측면을 포괄하는 생물심리사회모델(Biopsychosocial model)을 통한 접근이 요구됩니다.
상담, 약물치료 및 다양한 신체활동을 포함한 치료기법들과 함께 PTSD의 효과적 치료법으로 활용되고 있는 안구운동에 의한 기억 재처리(EMDR), 뉴로피드백 기법은 PTSD를 경험하는 개인들이 고통을 경감하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합니다. EMDR은 렘수면 상태에서 일어나는 뇌의 처리 과정을 깨어있는 상태에서 재현함으로써 정보처리시스템을 활성화하여 기억과 관련된 인지, 정서, 신체적 요소를 다룰 수 있도록 돕습니다. 뉴로피드백 기법은 뇌파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뇌의 활성화 및 최적화를 돕고, 트라우마로 인해 과각성된 뇌를 안정화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트라우마는 우리 뇌에 오랫동안 각인되는 흔적을 남기고, 우리 삶을 고통과 혼란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트라우마로 인해 변화된 뇌를 다시 회복하고,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비록 과거의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겼지만, 상처가 아물어 딱지가 앉고, 새살이 차오르는 것처럼 우리 뇌에도 긍정적인 변화와 새로운 기억들이 쌓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힘들고 슬펐다고 해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도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힘들고 슬펐던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우리 뇌에 새로운 기억과 연결고리들을 만들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정희주 원장
*참고문헌
유정. (2015). 심리적 트라우마의 정보처리: 뇌생리학적 근거와 트라우마 내러티브. 인간.환경.미래, 14, 29-65.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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