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현재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다니고 있는 열여덟 살 여고생입니다. 사람들은 미래에 있을 불행을 알면서도 왜 살아가는 거죠? 물론 행복도 있겠지만 저는 그것들을 맞닥뜨리는 것이 너무 버겁습니다.

생명은 왜 소중한 걸까요? 한 영상을 봤습니다. 우주는 무생물이 대부분이라 생물인 채로 살아가는 그 짧은 순간이 아주 소중한 거라고. 납득은 되어요.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이면 빨리 죽든 늦게 죽든 똑같지 않나요? 생명이 왜 소중한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생물이 되고 싶어요. 생명은 소중하다. 현재까지의 고찰로 내린 결론이지요. 그러나 ‘왜?’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습니다. 생명이 뭐가 소중한 겁니까?

개인으로서의 나는 ‘생명’이라는 것에만 있나요? 제가 죽겠다는데 이유 없는 그 생명의 소중함을 운운하며 저의 암전을 막네요. 사후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완전히 원자단위로 쪼개지는, 그렇게 하여 자살 후의 여생을 주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저는 그게 행복일 것 같아요.

사람들은 아깝다고 합니다. 성적도 우수하며 성격도 감초 같고 외모도 상위에 드는 사람인데, 왜 그런 우울한 생각을 하냐고. 심지어 담임선생님마저요. 그게 살 이유가 될 순 없잖습니까? 저와 반대인 사람은 죽어야하나요? 남들이 정한 미모, 성격과 같이 현재 모든 사람에 의해 추앙받고 있는 보편적인 것이 저는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그에 따라오는 관심과 기대. 그것을 채워야 하는 것에 대한 강박이 저를 아주 괴롭혀요. 그렇기에 저는 점점 이중인격자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그 평균과 기준과 악과 선과 긍정과 부정에 대해, 만물에 대해,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그 모든 것에 대해 평을 내리고, 그것을 주로 삼아 세상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요? 가치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아주 큰 틀에서 보면 똑같지요.

혼란스럽습니다. 진짜 제가 누군지…. 저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우며 의심스럽습니다. 과연 긍정적인 것이 정말로 긍정적인지. 부정적인 것이 정말로 부정적인지도. 자살은 부정으로 일컬어집니다. 

저는 예술적이고 형이상학적입니다. 현재 과학중점과정 중에 있으나, 문학을 통한 통찰과 철학적 의심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가끔은 이것이 제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 또한 심미적입니다. 저의 예술은 죽음으로 완결될 겁니다. 주체적인 죽음이요. 

물론 이것이 이해받지 못할 생각과 사상과 상념들이란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정신병자 같지요. 저를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미치지 않았으니까. 외려 사람들이 정한 ‘우울한’ 생각을 거듭하며 결국엔 이러한 가설이 나왔고. 자살과 동시에 이 가설은 저에게 결론이 되는 거예요. 시선을 조금 틀면 제 말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저는 본질을 찾고 싶어요. 완벽하고 아름다운 본질 말이지요. 못 찾는 것 저도 압니다. 그러나 찾고 싶어요. 그러나 본질을 찾는 것이 제가 살아갈 이유는 아닙니다. 그래도 일단은 살아 볼 예정입니다. ‘그때 안 죽기 잘했다.’라고 이 장면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드는 때가 오면요. 그게 계속 반복될 때까지만.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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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 주신 사연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현재 우울증 치료를 받고 계신 중이네요. 그리고 올려 주신 글로 미루어 보아 인생의 의미, 죽음에 대한 사유 등 인간 존재 자체와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과 그 답을 찾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과 죽음, 인생의 의미, 존재의 가치 등 누구든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고대 철학자들부터 종교인들,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이러한 질문 앞에 한 번쯤 말문이 막히고, 어디서 답을 구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구한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사람마다 발견한 답도 저마다 다르겠지요. 

사연자님께서 이러한 생각과 고민에 빠져 있으신 것은, 인간으로서 나의 존재 가치는 물론 삶을 대하는 태도, 앞으로 인생의 방향 등으로 확장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점은 바로 이렇듯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사유하는 것에 관심이 많고,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심미안이 높은 사연자님께서 다른 생명체가 아닌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한 축복이자 필연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사연자님의 사연글에서 ‘진짜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탐색 중에 큰 혼란감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들의 기준과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괴로워하는 마음이 전달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특히, 사람들이 기대하는 나와 진짜 나의 모습 사이에서 혼란스러움과 괴리감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흔히 청소년 시기에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와 같은 의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이 시기의 발달과업 중 가장 핵심적인 자아정체감을 확립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고, 자신의 개성이나 재능을 마음껏 탐색하고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은 청소년 시기에 자아정체감을 제대로 확립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쩌면 인간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와 사람들, 나와 세상의 경계와 관계 속에서 무수히 고뇌하고 시름하는 존재 말이지요. 

미국의 발달심리학자인 마르샤(Marcia)는 에릭슨의 자아정체감 개념을 보완해 자아정체감이란 자신에 대한 태도, 가치, 신념으로, 청소년기에 형성된 자아정체감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인기에도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르샤는 자아정체감의 수준을 자아정체감에 대한 탐구와 고민이 있는지, 자신의 역할에 얼마나 충실한지에 따라 다음의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도 현재 자신에 어느 상태에 해당하는지 살펴보신다면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ment): 정체감 성취는 자아정체감 형성에 관련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바람직한 상태로,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율적인 의사 결정을 하고 현재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을 의미합니다.

2. 정체감 유예(identity moratorium): 정체감 유예는 정체감 형성에 관한 고민으로 관련된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상태로, 미래의 가능성과 여러 역할들에 대해 실험하는 단계입니다. 흔히 대학 시절에 이 정체감 유예 상태에 머무르면서 여러 시도와 실험을 바탕으로 자아정체감을 형성하는 과도기적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3.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ure): 정체감 유실은 자아정체감 형성에 관련된 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채 어떤 어려움이나 불안감 없이 주어진 역할에 전념하지만, 인생의 가치관이나 직업 등 자기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하는 게 아니라 부모나 사회의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4. 정체감 혼란(identity diffusion): 정체감 혼란은 자아정체감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노력 모두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자기 의견에 기반한 의사 결정을 하지 못할뿐더러 현재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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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신가요? 아마도 사연자님께서는 현재 ‘정체감 유예’ 상태가 아닐까 추측되는데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세상의 기준이나 사회의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며 나만의 기준과 가치관을 탐색하고 정립하려는 사연자님의 모습에서 어쩌면 지금 시기에 사연자님께서 하시는 고민이나 질문들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도 건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처럼 세상이 정한 기준, 타인의 기대나 평가에 휘둘리지 마시고,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하면서 사연자님만의 가치관과 인생의 철학을 정립해 나가시는 모습이 저는 굉장히 멋져 보입니다. 그러니 지금보다 좀 더 타인의 시선이나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워지셨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시선에 갇혀 스스로를 옭아매고, 그 기준을 내면화한다면 자기 정체성을 올바로 확립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대나 시선으로부터 좀 더 의연해지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과 세상을 대하고, 자유롭게 탐색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청소년기에는 한 번쯤 ‘이만하면 어른이 된 것 같다.’, ‘더 살아 보지 않아도 세상을 얼추 알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영유아기와 어린아이, 청소년의 발달단계가 모두 다르듯, 성인과 노인의 삶은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살아 봐야만 아는 것이지요. 

그리고 많은 분들의 인생에서 불행과 행복, 기쁨과 슬픔, 아픔과 성장 등이 교차되듯이 사연자님의 인생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기쁨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각 단계마다 우리는 성장합니다. 사연자님께서 지금은 버겁다고 느끼시는 것들도 어쩌면 사연자님께서 ‘영원히 지금 이 상태에 머물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유하는 것을 좋아하고, 인생의 철학에도 관심이 많은 사연자님인 만큼 그 내면도 얼마든지 더욱 성숙해지고 단단해지리라 믿습니다. 그만큼 사연자님께 다가오는 인생의 역경도 그때그때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적인 힘을 기르는 것은 ‘사유’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꺼이 자신 앞에 주어진 생을 살아내고, 또 크든 작든 수많은 경험을 통해 또 다른 깨달음과 통찰력을 기를 수 있게 됩니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는 그 생각을 따라 깊게 사고해 보고, 또 참고 서적들도 탐독해 보면서 열심히 질문하고 답해 보세요.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인생의 여러 경험과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풍성하게 얻게 될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생의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수용소에서 약 3년 반 동안 인간 이하의 극한 삶을 몸소 체험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그 극한 체험 속에서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인간은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도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프랭클은 상황이 우리 행동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도 앞으로 펼쳐질 생을 통해 자신만의 삶의 이유를 찾아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빅터 프랭클이 남긴 한 구절을 들려드리는 것으로 사연자님의 삶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드릴까 합니다.

“어느 때건 인생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 어떤 인생에도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한 충족시켜야 할 의미, 실현해야 할 사명이 반드시 주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모르고 있을 뿐, 당신 발밑에 이미 있습니다.” _ 빅터 프랭클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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