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후반이지만 가진 것, 이뤄 놓은 것이 없는 반백수입니다. 이런 제 처지가 불안하고 초라하게 느껴져요. 원하는 일을 찾겠다고 진로도 이리저리 바꾸었는데 끈기는 없고 변덕도 심해 금방 그만두다 보니 결론적으로는 이렇다 할 경력 하나 없네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행도 마음껏 다니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러 유학 가는 지인, 연애 프로그램 속 멋진 외모와 직업을 가진 일반인 출연자 등... 요즘은 숨 쉬듯 다른 사람과 저를 비교하며 괴로워합니다. 심지어는 다니던 병원의 선생님을 보면서도 그런 기분을 느꼈어요. 남들로부터의 인정과 존경, 높은 보수와 지위, 게다가 남을 도울 수도 있는 일을 하는 선생님이 너무 빛나고 부러웠어요. 저와는 다른 세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저는 어릴 적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허영심이 강한 아이였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남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들을 포기하지 못해서 더 진로를 정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인정 욕구를 따라 어찌어찌 대학교까진 그럭저럭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대학교에 간 이후 타지 적응 문제, 대인관계, 맞지 않는 전공 등의 이유로 방황하고 의미 없이 보낸 시간이 길었던 것 같아요. 친구들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저는 제자리네요. 

이제는 졸업한 지 시간이 꽤 지났고, 제가 가진 것 중 그나마 괜찮은 것이었던 학교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인정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저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괴리에 열등감만 심해지고 힘이 듭니다. 뭔가를 이룰 만한 끈기와 능력이 없다면 인정 욕구라도 버리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되네요. 요즘은 나이가 나이인 만큼 주변에 결혼하는 사람들도 생기는데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한심한 나를 사랑할 사람은 없겠지.’라는 생각이 더해져 더욱 우울합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졸업 후 오랜 시간 동안 진로를 놓고 방황하시면서 여러 가지 고민도 많으시고 자신감도 다소 떨어지신 상태인 것 같습니다. 나이는 먹어 가는데 남들보다 뒤처진 것 같은 본인의 모습에 실망감과 좌절감, 후회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 계시는군요. 

사연자님뿐만 아니라 많은 20대 분들의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진로와 삶의 방향성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학을 졸업해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고, 직업인이자 사회인, 성인으로서 자리를 잡아 가는 것이 이 시기의 중요한 과업일 텐데요. 그 과정이 항상 순탄하고 수월한 것만은 아닙니다. 

사연자님께서 그러하셨듯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겪게 되고, 내가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주변의 시선과 기대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무엇이 내게 맞는 길인지 답을 찾기가 어려운 느낌이 들 때도 많습니다. 사연자님의 경우 말씀해 주신 것처럼 본인이 원하는 것, 잘하는 것,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보다는 주변의 시선과 인정에 더 초점을 맞추면서 괴리감도 느끼시고, 시작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일 동력도 충분히 얻기가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많은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진로와 직업 선택에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일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 관심 있는 영역, 내가 가진 능력과 기술, 경험치, 해당 직업 또는 분야의 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해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물론 사회적 인정이나 보수, 직업 안정성과 같은 현실적인 부분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진로나 직업 선택의 최우선 기준이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얻기 위한, 나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될 때 그 선택은 지속 가능성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일하는 순간마다 느끼는 보람이나 성취감, 성장하는 느낌, 일을 통해 얻는 물질적, 정신적 보상 등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아무리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안정적인 직업이나 진로를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힘들게 로스쿨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평판과 보수 모두 좋은 직업입니다. 그러나 변호사로서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본인의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변호사 업무를 하며 느끼는 가치관의 충돌로 인해 괴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변호사 사무실 개업 후에도 생각만큼 고객이 많지 않아 운영의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훌륭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나 분야라고 해도 모두 나름의 어려움과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직업이나 어떤 삶도 완벽하게 이상적이고, 안정적이며, 항상 인정받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외부로부터의 평가와 보상, 인정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외부의 평가와 인정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다 보면 안정감과 충만감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유복한 집안의 자녀, 유학 가는 지인, 연애 프로그램 속 멋진 일반인, 의사 선생님 등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주로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자신과 비교하는 현상을 ‘사회적 상승비교’라고 합니다. 물론 때로는 부러움이나 열등감이 부족한 점, 개선점을 돌아보고 개선과 성장을 위한 동력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교가 지나칠 때는 상대적 박탈감, 내가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 좌절감, 실패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현재 사연자님의 시선은 자신보다는 외부로 지나치게 쏠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허영심, 인정 욕구, 열등감이라는 것은 모두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 관한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실 사연자님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내가 부족하고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는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는 생각, 그렇기에 직업적 영역이나 다른 부분에서의 성취, 성공을 통해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현재의 내 모습에 가장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사연자님 본인이 아닐는지요. 

주변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고 이룬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내가 초라하고, 가진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그런 순간들을 마주하게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인생 여정에 따라 속도도, 방향도 다른 법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고 나 역시 반드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만큼 이루었다고 나 역시 같은 시간대에 그 선에 도달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는 그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각자 꾸준히, 묵묵히 걸어가면 되는 것이죠.

 

어린 시절부터 대학교까지 우리는 비슷한 교육을 받으며, 비슷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려왔습니다. 정해진 답을 찾는 것 같은 삶이었지요. 하지만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고 자신의 진로를 찾아가는 과정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교과서처럼 정해진 삶의 방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가며 나만의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생각과는 다른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밑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그리거나, 한번 칠했던 색을 다른 색으로 덧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나만의 작품을 그려 나가는 것이죠. 

처음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에서 실수할 수도 있고, 생각한 것만큼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행착오 역시 의미 있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시행착오를 ‘실패’로 규정하기보다는 ‘나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기 위한 경유지’였다고 생각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남이 원하는 그림이 아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무엇인지, 진정 내가 행복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사연자님 내면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 보시면 좋겠습니다. 누구와 비교해서 부족한 나, 모자란 나라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스스로를 먼저 인정해 주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들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길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생각을 전환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20대 후반이 많은 나이라고, 많이 늦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깊이 탐색해 보고 시도해 보기에 아주 늦은 시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앞으로 수십 년 혹은 평생을 하게 될지 모르는 일을 신중하게 살펴보고, 선택하는 데 충분히 시간을 갖는 것이 장기적 관점에서는 시간을 절약하고, 시행착오를 줄이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인정하고 격려하며, 본인이 원하시는 길을 찾아가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수면센터
대한민국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 이사, 사무총장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자문위원회 위원
보건복지부 감사자문위원회 위원
교육청 학교폭력대책 심의위원회 위원
생명존중정책민관협의회 위원, 산림청 산림치유포럼 이사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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