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비 오는 날에 헤어진 사람이나 과거의 기억들이 더 많이 생각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비를 보며 느끼는 감성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 오는 날은 더 많은 기억들을 떠올리는 데는 뇌과학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우리 뇌가 비 오는 날에 평소와 조금 다르게 작동하는 이유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조도가 낮아지고 습도가 높아져서 어둡고 축축한 느낌 때문에 우리의 기분도 어둡고 무거워집니다. 비가 천둥 번개를 동반하는 등 강한 소리와 함께 내리는 경우 뇌파의 불안정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잔잔한 빗소리에는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 오는 날에는 뇌에 여러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인데요, 어떠한 이유들이 우리의 뇌에 변화를 가져올까요?

 

▪ 빗소리가 α(알파)파가 발생시키는 안정된 뇌파 

비 오는 날은 뇌의 주파수가 낮은 α(알파)파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뇌파는 주파수와 진폭에 따라 분류되는데요, 대표적으로 α(알파)파는 뇌파의 성분으로 주로 8~13Hz의 주파수 범위의 규칙적인 파동을 연속적으로 나타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편안한 소리를 들을 때 α(알파)파가 가장 안정인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죠.

잔잔한 빗소리처럼 백색 소음과 유사한 자연의 소리들은 대개 저주파수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에너지 분포가 다른 ‘핑크 노이즈’를 생성하기 때문에, 일정한 스펙트럼이 뇌파의 안정에 도움을 주는 것이죠. 이러한 환경에서는 뇌파가 균일한 분포를 보이기 때문에 안정화가 이뤄지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쉽다고 느끼게 됩니다. 명상을 할 때에도 뇌파의 주파수가 안정화되면서 비슷한 상태에 이르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 뇌의 산소량, 호르몬의 변화로 인한 나른한 느낌 

산소는 우리 뇌의 감각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산소 포화도(oxygen saturation)는 신체에 있는 헤모글로빈 중 산소와 결합하여 포화된 헤모글로빈의 비율을 나타냅니다. 비가 오면 수증기가 더 많아지면서 기압과 산소 함량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공기 중의 산소포화도가 낮아져 조금 더 노곤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해요. 조금 편안하거나 나른한 느낌을 유발하는 것도 이러한 현상 때문이지요.

한편, 우리의 뇌는 빛의 밝기에 따라 멜라토닌, 세로토닌 등의 호르몬을 다르게 분비하며 감정조절을 담당하는데요, 비가 오면 조도가 낮아지면서 호르몬의 양이 변화해 뇌와 감정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멜라토닌의 분비는 증가하고 세로토닌 분비는 감소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일을 의욕적으로 하는 것보다는 감상에 젖기 쉬운 기분을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 젖은 흙 냄새의 박테리아가 분비하는 진정 효과 

비가 오는 날 피어 오르는 흙냄새를 맡아 보신 적 있으신가요? 비가 오는 날에 숲 인근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잠시 눈을 감고 흙 냄새를 음미하게 되는 현상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 흙 냄새에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박테리아가 분비하는 지오스민(geosmin)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식물의 씨앗은 비가 오지 않을 때에 발아를 막기 위한 기름 성분을 분비하는데, 비가 올 때 이 기름이 씻겨 내려 가면서 흙과 바위틈 사이에 모여 지오스민을 만들어 냅니다. 지오스민은 향수의 원료로도 쓰일 만큼, 짙고 매혹적인 향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요. 우리의 뇌는 기분을 조절을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비에 젖은 흙냄새를 맡기 위해 깊은 숨을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게 되는 것 입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 우리의 감정이 담긴 기억 인출이 용이한 비 오는 날 

그렇다면, 비 오는 날에는 왜 과거의 연인이나 친구가 생각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조금 더 복잡한 뇌과학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감성과 기억력, 그리고 현재의 상황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비 오는 날은 여러 작용에 의해 우리의 뇌세포 더욱 유연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 과거의 추억들을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비 오는 날은 우리의 감정 인출을 돕는 다양한 장면들이 뇌세포의 연결을 더욱 민감하게 만들어 추억들을 보다 생생하게 인출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 뇌는 '생각 회로'와 '감정 회로'가 상호작용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요, 생각 활동을 관장하는 영역을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감정 작용을 관장하는 영역을 변연계(limbic system)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움직이는 전두-변연계(fronto-limbic system)로 설명이 되는데, 이는 인지와 정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기억들은 비오는 날이라는 맥락 안에서 인출이 용이해 집니다. 과거에 비가 오는 날 특정한 인물과의 추억이 입력된 상태에서, 비가 내리고 있는 현재 기분과 과거의 기분이 일치할 때 해당 기억들을 인출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지와 정서가 연결되어 있는 상태의 맥락을 함께 저장한다는 의미에서 맥락 부호화(context encoding)로도 설명이 가능하고, 기분일치효과(mood congruence effect)라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연상 기억의 원리에 따라 저장되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의 기억도 이 원리에 따라 저장됩니다. 연상 기억은 이미지나 개념 따위와 같은 심적 활동의 여러 기억이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결합된 후, 어느 기억이 생각났을 때 다른 기억이 상기되는 현상인 것이죠. 사랑과 이별 같이 강렬한 감정을 느꼈던 비 오는 날의 경험이 있다면 함께 저장되었다가 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 비 오는 날 우리 기분을 관리하는 방법

비 오는 날, 조금 더 나은 기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떠오르는 과거의 생각을 멈추기 위해, 밖에 나가서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하거나,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밖으로 나가 초록 빛의 잎사귀와 좋은 음악들을 함께 들으며 비구경을 하다 보면 한결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분 전환은 특정한 생각을 멈추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기억의 작동 원리를 반대로 활용해 볼 수도 있겠지요? 비 오는 날에 좋은 추억이 되거나 기분 좋은 일들을 만들어 보는 것이죠. 가족들과 비 오는 날에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며 족욕을 해보거나 좋아하는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일들을 시도해 보세요. 비가 오는 날이면 여러분이 행복했던 시간이 자동적으로 함께 연상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말입니다. 

비와 기억에 대한 이야기에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시나요? 여러분의 행복한 기억들이 보다 강렬하게 자주 인출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특별한 순간의 행복을 인출하고 충분히 그 감정들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수면센터
대한민국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 이사, 사무총장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자문위원회 위원
보건복지부 감사자문위원회 위원
교육청 학교폭력대책 심의위원회 위원
생명존중정책민관협의회 위원, 산림청 산림치유포럼 이사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연주를 듣는 것 같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이 도움 받고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세요!"
    "선생님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어요."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