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모든 생각의 흐름을 말로, 안되면 (나 혹은 남자친구, 혹은 그때 그때 받아주는 누군가에게)카톡 메시지로 전해야 하는 하루의 모든 순간들,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언사들, 격한 흥분과 동요 상태, 강한 동조를 구하기 위한 자극적이고 저속하고 반복적인 언어들. 인정과 애정을 위한 과한 요구들, 극단적인 감정변화, 모든 대화의 중심이 자신이라 상식적인 맥을 이어갈 수 없는 대화 불능의 상태. '즉각적인 보상 상태'를(돈이거나 공으로 얻는 시간이거나 먹을 것이거나 인정이나 칭찬 같은 것들..) 위한 끝도 없는 요구들, 그 요구들에 무심하면 순간 '팀장님 최고!'에서 '죽일년'으로 돌변하는 기복....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의 상태입니다. 처음엔 친밀함의 표시나 에너지라고 긍정적으로 느꼈던 부분들이 점점 일상이 불가능할 정도의 극단적인 상태가 잦아지는 느낌입니다. 저도 사회생활 다 그렇지 하면서 해결하고 달래면서 넘어가려고 했던 부분들이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다 보니, 역치가 점점 낮아지고 작은 자극에도 민감해지는 느낌입니다.
왜 그럴까 고민하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던 중에 경계성 인격장애, 특히 연극성 인격장애에 상당부분 부합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끝도 없이 인정과 칭찬을 원하면서 정작 남의 말이나 일에는 심한 무관심 아니면 악담으로 일관하고, 언제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하는 같은 발단으로 업무적인 또는 업무적 관계의 트러블이 잦아서 결국 상사인 제가 대신 해결하거나 피해를 보는 일도 많았죠.
그럴 때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하면서 하루이틀 정도 극도의 복종 상태가 되어 시키지도 않은 자잘한 일들을 하면서(프린트를 대신 갖다주거나 파쇄할 종이를 한장씩 들고 있다 건네주거나.. 그럴땐 더 미칠 것 같아요) 자신의 잘못을 만회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그녀가 일으킨 업무적 관계의 트러블들이 저의 '탁월한 해결능력'이 방점이 아니라 연극성 인격장애의 '극도의 의존성'이었다는 것을요.
처음에는 타일러도 보고, 차갑고 정확하게 화도 내보고, 업무적인 영역에서 바로잡아보려고 노력도 해보고 했지만 도무지 말이 통하지가 않아요. 이제는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지고 또 언제 극단적인 상태가 될까, 막말을 할까 조마조마하기만 합니다. 그냥 일 얘기를 하려고 해도 그 사안의 백분의 일 정도 되는 자신만의 사안을 가지고 이상한 방향으로 튈게 뻔합니다. 한 가지 일을 시키면 이상한 의심과 자기 확신으로 확장되면서 저에게 열 가지 일로 되돌아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당히 무시하거나 거리를 둬라, 관계를 정리해라" 같은 해결책은 정작 밀접한 업무관계에서는 적용하기가 쉽지 않네요.
답변)
안녕하세요, 광화문숲 정신과 정희주입니다. 직장동료와 관련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계신것 같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관계라면 그 사람 자체를 멀리하는 방법이 있지만 가족, 직장동료와 같은 관계는 어찌되었건 계속해서 끌고가야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직접 보지 않고 특정 성격장애를 진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직장동료분 역시 글쓴이분이 묘사한 내용으로는 어떠한 진단적 결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몇가지 면에서 경계성 성격장애의 특성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직장동료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차라리 경계성 인격장애가 무엇이고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려드리는게 차라리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경계성 성격장애는 자기와 타인에 대한 이미지가 불확실하고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타인에 대한 안정적인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 사소한 행동에도 극단적으로 평가하고 과하게 반응합니다. 예컨대 직장상사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는 이미지가 명확히 있다면 어느날 조금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는 타인에 대한 기존의 안정적인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 직장상사가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순간 오로지 나를 미워하는 나쁜놈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나에게 칭찬을 한다면 한없이 좋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시시각각 예측할 수 없는 극단적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안정적인 이미지가 없다는 것은 자존감이 낮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적당히 괜찮은 자신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순간 자신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못난사람이 돼버립니다. 그러니 비판이나 평가에 예민할 수 밖에 없고 시종일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방어적인 태도에도 어느 순간 비판을 직면하게 되는 순간이 있게마련이고, 그럴때면 한없이 무너져버리기도 합니다.
위와 같은 반응을 이상화와 평가절하라는 방어기제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분열’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한없이 좋은 편, 온전히 나쁜 편으로 편을 갈라 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충도적인 특성은 자연스레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경계성 성격장애인 사람을 대할 때는 우선 그 사람을 바꾸려는 과도한 기대나 시도는 버려야합니다. 친구, 직장동료는 치료자가 아니며 주변 사람의 충고같은 것은 어떤 사람의 성격을 바꾸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합니다. 기대치를 낮추셔야 내 마음이 편하고 좀 더 현실적으로 그 사람을 대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경계성 성경장애를 가진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예컨대 주어진 일을 하지 않거나, 무단으로 결근을 하거나, 타인을 상처주는 것 같은 행동에 동의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내면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매우 취약하고 매순간 바람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내 마음의 평정심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취약한 마음의 구조를 보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잘못한 점에 대해서는 용인하기 보다는 적절하게 지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경계성 성격장애의 특성상 주변 인물들이 일을 크게 만들기 싫어서 잘못된 행동도 계속해서 묵인하는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적절한 감정과 행동의 지침, 타인과의 경계를 파악하는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고 경계성 성격이 더욱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잘못을 지적할 때 중요한 점은 부연 설명을 과도할 정도로 덧붙여야한다는 것입니다. 번거로울 수 있겠으나 하나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그 사람의 여러가지 장점과 잘한 점, 그 잘못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이해한다는 표현, 너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지 너라는 사람 자체를 평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는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경계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작은 행동에 대한 지적에도 자신의 모든 부분이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이 있다면 그 때는 잠시 피하고, 이후에 안정된 상항에서 최대한 절제된 어투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고 이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취해야합니다. 욕설이나 폭력과 같은 타인에 대한 침해, 정당한 업무 지시에 불복하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명확하고 확실한 불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개인의 삶에 한계를 설정하고 조직화 해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경계성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태도입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정신과 정희주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