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정정엽 전문의]

 

 

 

지난 9월 Time지의 2021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미국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Simone Biles)가 뽑혔다. 도쿄 올림픽(2021)은 많은 볼거리가 있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국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Simone Biles)의 기권 장면이다. 시몬 바일스는 1997년생으로 리우 올림픽 4관왕 등 체조의 전설로 불리는 선수다. GOAT(Greatest Of All Time)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이다. 이번 무대에서는 어떤 경기를 펼칠지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는 와중에, 시몬 바일스는 자신의 정신건강을 우려하여 기권을 단체전에서 결정했다. 이미 도마 종목에 출전한 뒤 내린 결정이었다.

시몬 바일스의 기권은 왜 그렇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을까? 그의 경기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신체적인 증상도 없는데 너무 섣부른 결정을 내린 것으로 느껴진 게 사실이다. 부상을 입은 채로도 악착같이 경기를 끝내는 선수들을 미덕으로 알았고, 그러한 문화가 오랜 시간 형성되어 왔기도 하다. 그 때문에 진정한 선수라면 그렇게 해야지, 하고 당연하게 믿어왔던 것 같다.

 

시몬 바일스는 수백 명의 미국 체조 선수를 장기간에 걸쳐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전 국가대표 주치의 래리 나사르의 생존자이다. 그는 감옥에 갔고, 시몬 바일스는 생존자 중 유일하게 도쿄올림픽에 참가했다. 그 때문에 더욱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을 것이다.

위의 이유로 시몬 바일스가 더욱더 뛰어난 경기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뜨거운 관심 속에 놓여있던 건 사실이다. 그 가운데 내린 기권 결정이라니. 이 결정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팬들을 실망시켰다.’, ‘나약하다’는 비난이 따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아쉬운 것은 본인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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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은퇴 시기인 체조선수 특성상 마지막일 수도 있는 올림픽 단체전에서, 자신의 정신건강을 우선시한 결정과 그 용기는 어디서 왔을까?

수치심에 대해 20년 넘게 연구한 미국 휴스턴 대학의 교수 Brenne Brown는 ‘취약성(Vulnerability)’이라는 개념에 대해 3가지 요소를 들어 이야기했다.

불확실성(Uncertainty), 불안(Risk), 감정 노출(Emotional Exposure)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취약성은 나약함이 아니며,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낼 때 ‘취약성의 힘(The Power Of Vulnerability)’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때, 무턱대고 취약성을 말하고 드러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을 때, 얼마나 용기를 내어 자신을 드러내는가가 관건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나는 불안전하다’라고 말할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몬 바일스의 용기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기권의 결과를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었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I had the case of the twisties.”

 

(twisties는 공중에 뜬 상태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말한다. 크게 다칠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

이는 체조선수로서 가장 큰 두려움을 노출하는 말이다.

 

기권한 후 시몬 바일스는 단체전을 열심히 응원했다. 그리고 평균대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중압감, 부담감을 이겨내고서 보여준 흠 잡을 데 없는 연기였다. 정신건강을 관리하며 거머쥔 결과이기 때문에, 그 어떤 금메달보다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The bronze means more than all the golds.”

 

정신건강을 살피고, 그 취약성을 인정한 바일스의 행보는 취약함은 약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오히려 자신의 취약성을 제대로 알고 점검하는 것은 ‘취약성의 힘’을 끌어내는 태도라는 것도 말이다.

만약에 바일스가 ‘부상투혼’으로 일컬어진 관행에 따라, twisties 등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숨기거나 외면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막대한 부담감과 긴장감을 버티며 치른 경기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우리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바일스가 기권하고 보여주었던 강인한 태도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면모 또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취약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위험과 노출 정도를 정확히 자각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정신의학자이자 저명한 심리학자인 융(Carl Gustav Jung)은 수치심에 대해 영혼의 늪지대라고 말했다.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늪처럼, 언젠가 한 번씩은 수치심에 허우적거리느라 다른 기회를 놓친 적이 있을 것이다. 영혼의 늪지대를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용기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강한 척 이 악물고 견뎌야 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 사고방식이다. 선수들의 삶이 올림픽 하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듯, 우리의 삶 또한 하나의 목표만을 이루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살피며, 취약함을 인정해야 더 멀리 보고 향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특히 취약한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부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신경 쓴다면, 취약성을 더 이상 약점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더 큰 힘으로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수면센터
대한민국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 이사, 사무총장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자문위원회 위원
보건복지부 감사자문위원회 위원
교육청 학교폭력대책 심의위원회 위원
생명존중정책민관협의회 위원, 산림청 산림치유포럼 이사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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