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박사 이광민의 [슬기롭게 암과 동행하는 방법] (18)
[정신의학신문 : 마인드랩 공간 정신과, 이광민 의학박사]
‘받아들임’의 과정
때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려운 순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받아들임’은 어느 순간 훅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항상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암을 진단받았던 순간을 떠올려본다면 처음에는 아주 힘들고, 당황스럽고, 화가 났을 수도 있고, 혹자는 극도의 불안이나 우울감을 경험했을 겁니다. 하지만 현재 암을 겪고 있다고 해도, 지금 느끼는 감정과 맨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의 감정은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일정 부분 암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어느 정도 경험하고 난 다음이라면 말입니다.
초반에는 암이라는 것 자체가 절망과 때로는 죽음, 내 인생의 끝자락을 보게 만들곤 합니다. 초반이 지난 후의 암은 내게 때때로 고통을 주기도 하고 염려와 불안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내 삶에 대해 돌아보고, 내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다시금 보게 하며,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초반과는 조금씩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까닭은 ‘받아들임’의 과정입니다.
필요한 불안과 불필요한 불안
‘받아들임’의 과정에서 제일 큰 것은 불안입니다. 내 몸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불안, 재발에 대한 불안 등이 있죠. 불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필요한 불안’과 ‘불필요한 불안’이 그것입니다. 불안은 우리 마음 안에서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계속 치고 올라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필요한 불안과 불필요한 불안을 나누어, 불필요한 불안을 몰아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불안 중에서도 본인에게 필요한 불안은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필요한 불안과 불필요한 불안을 구분할 때 제일 중요한 요소는 내가 바꿀 수 있는 현실이 있고, 바꾸지 못하는 현실이 있다는 걸 아는 것입니다. 바꾸지 못하는 현실이라면 이에 대해 고민하고 불안해해 봤자 괴로울 뿐입니다. 과거와 관련된 상황은 대표적인 불필요한 불안에 꼽힙니다. 머나먼 미래에 대한 불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 본인의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불확실한 가정이고 미래이기 때문에 고민하고 불안해해 봤자 해결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본인이 현재 상황과 불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는 불안은 손에 쥐되, 그렇지 못하는 불안은 놓으려고 하는 반복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어느 순간 찾아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암 경험자라면 누구나 다 겪어보았을 것입니다. 진단 시점부터, 치료를 잘 받으며 암이 몸 안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암 자체가 죽음이라는 단어와 개념상 일정 부분 맞닿아 있어서, 본인도 모르게 불안이 엄습해올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질문이자 감정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본인이 갑자기 돌발적인 사건, 사고, 질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를 이야기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의 죽음과 남겨질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지금의 우리만이 아니라, 아주 먼 옛날 사람들 역시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것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라는 단어가 큰 철학적인 주제 중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을 어떤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나의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하는 부분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후 세계를 생각함으로써, 본인이 조금 더 편안한 곳으로 넘어간다는 믿음으로 극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이 정답인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본인이 죽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 개념을 가져갈 것인가, 즉,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 것인지에 관한 생각입니다. 죽음에 관한 생각이나 고민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은 막상 죽음이 본인의 시야에 들어왔을 경우 공포가 어마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고 난 후에 천당이 있을지 극락이 있을지,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우리가 삶의 끝 이후의 영역을 긍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 자체를 소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게는 연세가 100세 가까이 되신 할머니가 있습니다. 저는 할머니 손에 자라서 할머니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간혹 기억력도 많이 떨어지시고, 옛날에 제가 사랑했던 할머니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져 깜짝 놀라기도 하고 슬플 때도 있습니다. 제게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이 엄청난 공포입니다.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말입니다. 연세를 생각하면 죽음을 떠올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요.
그때마다 할머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어도 어차피 하늘나라 가서 다 같이 만날 텐데 뭐가 그렇게 두렵고 슬프겠냐.’ 할머니는 죽음 자체를 절망이 아니라 소망으로 받아들이신 것 같습니다. 설령 죽음에 따른 일시적인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그다음에 본인에게 더 큰 소망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잉 온 캠페인’은 대한암협회와 올림푸스한국에서 암 경험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사회 복귀를 지원하기 위해 기획한 프로그램입니다. 그중 ‘고잉 온 토크’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광민 박사와 암 경험자가 만나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공유하면서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대처법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암과 관련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소통 채널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영상 내용을 정리해 연재합니다.
※ ‘고잉 온 토크’ 강의 직접 듣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박사,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