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임지섭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온 40대 여자입니다.(미혼)
현재도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고, 그 가정폭력 및 폭언은 여전합니다.
폭력은 일 년에 1~2번 정도로 줄어들기는 했습니다.
정신과 진료는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고, 회사도 잘 다니고 있습니다.
요즘 계속 아버지와의 마찰이 있어 말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쌍욕을 포함한 폭언을 수차례 듣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우울증 테스트를 해보니 ‘중한 우울’이라고 나오고
불안감 테스트도 높은 점수가 나왔습니다.
잠은 잘 잡니다.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고 싶은데
저희 작은아버지가 정신과 의사입니다.
저희 아버지와 어릴 때부터 한집에 살았으니 아버지의 성격이나 폭력성도 매우 잘 알고
이런 저희 집안 사정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지나가는 말로 저의 이런저런 신체적 증상을 얘기하니 그런 증상들 모두 “우울증의 한 부분이다.”라고 얘기해주신 적도 있고요.
저의 이런 백그라운드 및 심리상태를 모두 알고 있으니
상담이 더 잘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어 작은아버지에게 진료를 받아볼까 하는 생각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이라서 저를 객관적으로 진료해주시는 게 가능할까..’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제가 어떠한 선택을 하는 게 옳을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과 전문의 임지섭입니다.
글쓴이님께서는 아버지의 폭력과 폭언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인터넷으로 우울증 자가테스트도 해보고, 여기에 와서 글을 남겨 주실 정도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주저하고 계실지,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막막해하면서, 상처가 더 깊어지고 있는 건 아니신지 걱정이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좋을지 질문을 하셨는데요, 결론 먼저 이야기를 하자면,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이 의사라면, 진료과를 불문하고 직접 진료받는 것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습니다. 가벼운 문제라면 괜찮을 수도 있지만, 더 중대한 문제일수록 바람직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특히,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미 글쓴이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객관성’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까운 사이에서 직접 진료를 하게 될 경우, 민감한 문제일수록 기존 관계에서의 선입견 때문에 의사 입장에서 문제를 실제와 달리 판단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증상이 심각한 상태인데도, 사적으로 알고 있는 모습 때문에 실제보다 상황을 가볍게 판단할 수도 있고, 반대로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이다 보니 걱정하는 심정에 실제 상황보다 상태를 심각하게 판단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비밀보장과 관련해서도 문제가 생깁니다. 일단 의사-환자로서의 관계 이외에 기존의 관계가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에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속마음이나 증상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데 부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음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싶으면서도, 기존의 관계들 때문에 어떤 일들은 부끄럽거나 두려워서 자세하게 드러내기가 불편해집니다. 이는 정신과 진료에 있어서 어려움이 됩니다. 진료실 외 환경에서 마주쳐야 하는 가족에게 과연 마음 편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증상을 숨김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괜히 했나? 혹시 우연히라도 나를 아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전혀 없을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불편한 마음이 커지게 됩니다.
세 번째로, 치료자의 입장에서도 어려움이 생깁니다. 정신과 의사도 사람인지라 상대에 대한 감정과 생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사람이 주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색안경을 끼고 걸러서 듣거나,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글쓴이님을 과거부터 알고 지내왔던 친척의 경우, 과거에서부터 알고 지내왔던 그 자체가 치료의 어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복잡한 관계들로 인하여 제대로 된 조언을 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제대로 치료할 기회를 놓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는 글쓴이님과 주변 모두에게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저나 다른 많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가까운 관계일수록 직접 진료하기보다 추천할 만한 다른 의사를 찾을 때가 많습니다. 가까운 사이에서 거절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복잡한 관계 때문에 치료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속상한 일입니다. 다른 의사를 소개할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치료를 위해 더 나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진료하는 의사가 내 가족이나 친척, 친구이거나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소개받은 의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불안해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병의 진단, 평가, 치료는 심층적인 면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과거의 성장 과정, 살아온 길과 맥락을 함께 파악해 치료에 활용하게 됩니다. 꽤 긴 시간 동안 본인이 이야기하는 삶의 여러 영역을 함께 이야기하고 통합하면서 치료가 일어납니다. 이렇듯 의사와 환자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치료적 관계가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려운 일이시겠지만, 용기를 가지고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