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두영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눈물을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부모님 돌아가실 때, 나라를 잃었을 때라고 하죠. 장난감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겁주기 위해 썼을 것 같습니다.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라며 고추가 떨어진다는 협박도 합니다.
만약 이 소년이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는 쪽으로만 자랐다면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반대로 어린 소년이 여동생이나 엄마를 보호하겠다며 작은 몸으로 용감한 행동을 하거나 양보할 때는 칭찬을 듣기도 합니다. ‘남자다움’은 어떻게 칭찬이 되기도 하고 족쇄가 되기도 할까 궁금해집니다.
남자와 여자는 성염색체와 호르몬에 의한 신체의 차이로 인해 두 집단으로 구분되지만 각 개인은 다양한 특성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키는 대체로 남자가 여자보다 크지만 키가 남자 평균보다 큰 여자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처럼 말이죠. 수학, 과학에 남자가 더 적합하다는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유명 과학자도 있었지만 설사 평균적으로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의 차가 더 클 것입니다. 교육환경을 생각하면 성별 차이에 의한 것인지 계산조차 힘들 것입니다. 반대로 상대를 공감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에는 여자가 더 적합하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위 이야기가 반복될 것입니다.
성별의 차이가 마음건강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우울, 불안을 호소하는 환자들은 여성이 더 많고, 알코올이나 도박 중독 혹은 폭력적인 반사회성은 남자에서 더 많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성호르몬의 차이인지 환경과 교육에 의한 차이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집단 전체로 보면 진료현장에서 만나는 무기력한 우울증 환자들의 경우 남자들은 대체로 슬픔을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내가 현재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슬픔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자 환자의 경우는 알코올이나 니코틴 중독 문제에서 남자들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치료에 불편을 겪습니다. 남자는 울면 안 되지만, 술 담배로 풀어도 된다는 사회 분위기가 이런 결과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남녀에게 다른 것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문화는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요? 육체적인 힘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사회에서는 가장 힘센 남자가 리더가 되었을 것입니다. 의학의 도움 없이 목숨이 위험한 임신과 출산을 담당하는 여자를 보호해야 했겠죠. 자손을 많이 낳아야 씨족이 번성하니 짐승이나 적의 위협에서 아녀자를 지켜야 했을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하여 육체의 힘보다 경험과 지혜가 중요해지면서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권력이 옮겨졌을 것입니다. 농사나 전쟁은 남자가 경험을 쌓기 유리한 분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육체적으로 힘이 센 20대 남자가 자산과 경험이 많은 40대 여자보다 한 해 동안 더 많은 부를 일궈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전쟁만 하더라도 원시적인 형태에서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점점 근력의 가치가 감소합니다. 부대원들의 어려움을 공감해주고 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이나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 중요해집니다. 좀 거칠어도 힘이 세면 인정받았던 것들이 줄어듭니다. 상황은 바뀌었는데 ‘남자니까 책임지고 가족을 먹여 살려라’는 요구에 무력해집니다. 슬픔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폭력에 익숙한 남자들의 자살 성공률은 여자보다 높습니다. 자살시도는 여자가 더 많지만, 더 공격적인 방법을 쓰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경제적 어려움에 자신의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소식이 가끔 뉴스에 나옵니다. 슬픔을 나누고 함께 해결하기보다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책임지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뒤따릅니다.
‘남자다움’이라는 옛날 말에서 요구되는 어려움을 인내하고, 위험 앞에서도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좋은 가치입니다. ‘여자다움’이 부드럽게 공감하는 것을 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요. 양쪽 모두를 가지고 있어야 좋은 리더가 될 것입니다. 전장에서는 용맹한 장군이 어린 병사를 잃었을 때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면 군대의 사기가 좋을 수 있을까요. 좋은 아버지, 남편, 남자 친구가 되는 것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이 가는 사람이 되겠죠.
남자다움을 언급하며 타인이 원치 않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적인 행동입니다. 남자답게 여자 친구가 만족할 선물을 해줘야 한다, 좋은 신혼집을 구해야 한다, 잠자리에서도 뛰어나야 한다는 말은 개인을 억압합니다.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 요구들입니다. 여자답게 공부는 그만하고 남동생들 뒷바라지하라는 말과 차이가 없는 시대착오적인 말입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개성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키며 용감함과 부드러움을 더해갈 때, 좋은 사람, 좋은 남자 친구,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떼를 쓰며 우는 소년에게는 속상함을 공감해주고 나이에 맞게 인내하는 것을 응원해줘야 합니다. ‘남자답게’라는 틀로 겁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내게 남자다움을 말한다면 나눠서 생각해봅시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더 인내하고 적절한 위험을 감수할 줄 알길 바라는 의미로 나의 성장을 위해 한 말이라면 그 뜻만 받읍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말이라 판단하고 논박을 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요즘 세상에 어느 옛날 얘기를 하냐고 가볍게 핀잔을 줄 수도 있습니다.
<본 칼럼은 부산은행 사외보 2021년 9월호에 ‘강요받은 남자다움의 폐해’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